1810년대, 산업 혁명으로 생업을 잃을 위기에 처했던 영국의 노동자들은 “기계들을 부수자. 그래야 우리가 잘 살 수 있다”며 들고 일어섰습니다. 기계가 노동자를 대체할 것을 우려한 기계파괴운동, ‘러다이트 운동’입니다. 그런데 2019년 한국 가요계에서 ‘21세기 러다이트 운동’이 꿈틀대고 있습니다. ‘음원 사재기’ 브로커들이 매크로 프로그램으로 재생하는, 일명 ‘기계픽’ 노래를 거부하겠다는 소비자들의 움직임입니다.
시작은 그룹 블락비 멤버 박경이었습니다. 박경은 지난달 24일 SNS에 동료·선후배 가수들의 이름을 언급하며 “○○○처럼 사재기 좀 하고 싶다”고 적었다가, 거론한 가수 6팀에게 피소됐는데요. 그간 차트 순위 왜곡을 의심하고 있던 누리꾼들은 오히려 박경을 응원하며 그의 노래를 구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재기로 조작된 음원 순위를 사람의 힘으로 바로 세우자는 취지였죠.
고름이 터지면 진물이 나기 마련입니다. ‘박경 사건’ 이후 가요계에선 사재기 브로커를 둘러싼 폭로가 줄을 이었습니다. “브로커가 수익을 8대 2로 나누자고 했다”(김간지). “음원 순위를 올려주겠다며 억대의 돈을 요구했다”(이승환), “(사재기) 업체에서 노래 제목과 내용에도 관여한다”(성시경)…. 최근엔 브로커들의 수법이 더욱 교묘해졌다고 합니다. 페이스북 페이지나 유튜브 등에 올라온 2차 창작물 덕분에 노래가 ‘역주행’한 것인 양 꾸며낸다는 건데요. 래퍼 마미손은 신곡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에서 “유튜브 조회수 페북(페이스북)으로 가서 돈 써야지”라는 가사로 이를 풍자하기도 했죠.
음원 사재기를 적발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2013년 대형 기획사들이 음원 사재기 브로커를 검찰에 고발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이 내려졌죠. 가수 닐로, 숀의 사재기 의혹을 조사하던 문화체육관광부는 올해 2월 “데이터 상으론 사재기 혐의를 찾을 수 없다”고 밝혔고요. 음원사이트들 역시 ‘비정상 패턴을 보이는 ID를 수시로 적발하고 있다’는 입장입니다.
이에 문체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지난 8월 콘텐츠공정상생센터에 신고 창구를 열었습니다. 업계 종사자가 증빙자료와 함께 신고하면 음원사이트 업체로부터 자료를 제출받아 분석하고 행정 조치를 하겠다는 방침인데요. 한국연예제작자협회, 한국음악콘텐츠협회,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한국음악실연자연합회 등 음악 산업 단체들도 지난달 22일 ‘건전한 음원ㆍ음반 유통 캠페인 윤리 강령 선포식’을 열고 적극 협조 의지를 밝혔습니다.
일각에선 사재기를 유인하는 ‘실시간 차트’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실제로 미국 빌보드 핫100, 영국 오피셜 차트 등 해외의 주요 음원 차트는 순위를 일주일에 한 번씩 만 발표하고 있죠. 음원 이용료가 지나치게 싸다는 점도 사재기 근절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꼽힙니다. 월정액 상품을 이용하면 한 달에 1만원이 안 되는 금액으로 스트리밍을 ‘무제한’으로 즐길 수 있는데, 이런 낮은 음원 가격이 사재기를 쉽게 만든다는 지적이 계속해서 나오는 겁니다.
이 기사를 쓰는 2일 오후에도 사재기 의혹을 받는 어느 가수의 소속사에선 ‘악플러들에게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는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소속사 관계자는 “응원해주시는 팬 분들에게 부끄럽거나 떳떳하지 못한 행위(사재기)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라면서 “진심은 통한다는 것을 믿는다”고 호소했는데요. 우리는 누구를 믿고 누구와 싸워야 할까요. 모쪼록 아무도 억울하지 않은 시장 환경이 만들어지길 바랍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