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신민경 기자 =“세탁세제랑 주방세제 좀 사 와라”라는 어머니의 호출에 부랴부랴 들른 동네의 한 대형마트. 수십 개가 넘는 제품이 진열된 매대에서 이것저것 제품을 손에 쥐고 살펴본다. ‘찌든 때 한방에’ ‘설거지 손쉽게’ 등에 눈이 휘둥그레진 걸 보면 각종 홍보 문구에 현혹된 게 분명했다.
살갗에 닿는 옷가지, 입에 갖다 대는 식기들. 병균으로부터 가족을 지켜줄 세제를 찾기 위해 손과 눈이 분주했다. 그중 낯익은 이름이 눈에 띄었다. 지난 2011년 가습기살균제 참사사건의 주범으로 꼽힌 그 기업이다. 들고 있던 제품을 이내 곧 손에서 떨어트린다.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세간에 알려진 지 9년째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그 이름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고통과 두려움의 시간은 함께 흐른다. 고통이 계속되는 피해자의 신음은 많은 소비자들에게 그때의 공포를 떠올리게 한다.
지난달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대규모 소비자 피해 사례 발표 소비자권익 3법 입법 토론회’에는 산소호흡기를 단 채 등장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조순미씨가 힘겹게 마이크 앞에 섰다. 아직 법적 공방이 끝나지 않았다는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몸은 힘들어지지만 가해 기업과의 가습기살균제 피해 관련 법정 다툼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호소했다. 조씨는 지난 2018년 3월 가습기살균제 관련 질병에 천식도 포함하라며 옥시레킷벤키저에 첫 소송을 제기한 피해자였다. 2년 넘게 홀로 외로운 싸움을 준비한 조씨는 숨쉬기도 벅차지만 이달 있을 법정공방의 시작을 또 준비해야 했다.
오래된 공포에는 기업 불신도 한몫했다.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는 지난 18일 기자회견을 열고 당시 환경부 산하기관이었던 국립환경연구원이 흡입 독성시험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을 마련해 놓았지만 기업이 이를 모두 지키지 않았다고 밝혔다. 가습기 살균제를 최초 개발한 유공을 비롯해 옥시, LG생활건강, 애경산업이 이에 해당했다. 이는 최근 많은 소비자가 화학 생활용품에 신뢰를 잃은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정부는 시장을 중재할 든든한 감시자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특조위는 1일 조사결과 발표를 통해 “2011년 시행된 질병관리본부의 '동물독성시험' 적정성을 조사한 결과, 예비시험에서 가습기메이트 제품을 제외했음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특조위는 “(당시) 질병관리본부가 최초 흡입독성시험에서 가습기메이트 제품을 제외해 피해자들의 고통과 사회적 파장이 컸다”고 지적했다.
급기야 스스로 지킬 제도를 마련해달라고 피해자는 직접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와 ‘집단소송제’다. 국회도 필요성을 공감했는데,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가습기살균제, BMW 차량연쇄 화재사고, 금융·카드사 및 인터넷 포털 개인정보 유출 등 대규모 소비자 피해가 끊이지 않고 있다”면서 “그러나 기업이 소비자에게 사과하고 보상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기억이 없다. ‘징벌적 배상에 관한 법률안’과 ‘소비자의 권익 보호를 위한 집단소송법안’을 발의한 이유”라고 강조했다.
무책임한 기업과 무능한 정부라는 틀안에 놓여진 피해자와 소비자. 그 모습은 위태롭기만 하다. ‘제2의 가습기살균제 참사 사태 방지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면 기업과 정부는 ‘아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소비자의 두려움만 증폭하고 있다. 살기위해 해답을 스스로 찾고 있는 피해자와 소비자들. 내년엔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새해에는 소비자를 지킬 든든한 사회적 안정망이 나타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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