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을 용서하지 않은 가사
25년 전부터였다. 우리 사회 어두운 면을 파고드는 유영진의 시선이 아이돌 그룹 노랫말로 되살아나기 시작한 건. 유영진이 작사·작곡한 그룹 H.O.T.의 데뷔곡 ‘전사의 후예’는 “니(네) 친구였던 나를 / 죄의식 없이 구타하곤 했어” “그들은 나를 짓밟았어 / 하나 남은 꿈도 빼앗아갔어” 같은 가사로 학교 폭력 피해자의 심경을 대변했다. 전국 중·고교에서 폭력서클인 일진회가 기승을 부리던 사회상 반영한 이 곡은 발표 당시 10대들에게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 같은 사회비판적인 가사는 1~3세대 아이돌들이 발표한 노래에 반복해 등장하며 SMP를 이루는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그룹 동방신기는 ‘트라이앵글’에서 “미래를 향한 꿈도 죽어버렸어”라며 희망 없는 현실에 일갈했고, 엑소는 디지털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 사회를 “스마트한 감옥”(‘마마’)이라고 비판했다. 세상과 싸워 변화를 이뤄 내리라는 ‘유영진 ℃’의 뜨거움은 SM엔터테인먼트 문화 세계관, 즉 SMCU에서도 계속된다. SMCU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곡이자 유영진이 작사한 ‘넥스트 레벨’은 세상을 혼란에 빠뜨린 악당 블랙맘바에 맞서 광야로 떠나는 에스파의 결의를 보여준다. “아임 온 더 넥스트 레벨”(I’m on the next level), “제껴라 제껴라 제껴라” 등 네 멤버들 목소리 위로 내 목소리를 얹다 보면, 만난 적 없는 ‘아이’(ae·아바타)와 함께인 듯한 결속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 H.O.T. - ‘아이야!’ ‘늑대와 양’, 동방신기 - ‘라이징 선’ ‘오-정.반.합’, 보아 - ‘걸스 온 탑’
■ SM 성대 대물림…날카로운 고음
구전설화에 따르면 SM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 중에는 ‘유영진이 성대로 나온 자식’의 계보가 이어지고 있다. ‘유영진이 성대로 낳은 자식’이란 유영진 특유의 창법을 잘 소화하는 가수를 말하는데, 누가 유영진의 ‘성대 자식’인지를 두고는 듣는 이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의견이 나오곤 한다. 다만 이런 와중에도 ‘슴덕’ 사이에서 공통으로 거론되는 유영진의 ‘성대 자식’이 넷 있으니…그룹 S.E.S. 멤버 바다, 동방신기 멤버 최강창민, 엑소 멤버 디오, 그리고 에스파 멤버 윈터 되시겠다. 알앤비(R&B) 장르의 흥을 살리면서도 깨끗하고 깔끔하게 목소리를 뻗어내는 창법이 이들 네 사람 보컬의 특징. 특히 한 음 한 음을 정확히 짚어내며 날카롭게 고음을 뽑는 발성은 ‘유영진스러운’ 목소리의 대표 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넥스트 레벨’에서 유영진이 새로 만 브리지 구간을 들어보자. 윈터가 부른 이 구절을 듣고 온라인에선 ‘유영진을 삼킨 보컬’, ‘바다 목소리에 유영진 창법’, ‘유영진뿐 아니라 보아 최강창민 바다 강타 등의 영혼이 빙의된다’ 같은 반응이 줄을 이었다. 해당 소절을 최강창민이 따라 부른 영상까지 섭렵한다면, ‘유영진의 영혼이 담긴 창법’에 한 발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 S.E.S. - ‘러브’, 동방신기 - ‘주문 – 미로틱’ ‘왜’
■ 그대의 향기, 알앤비의 향기
유영진이 창시한 SMP는 댄스·록·힙합·일렉트로닉 등 여러 장르가 혼합된 ‘하이브리드 음악’으로 불리지만, 유영진 음악의 뿌리는 알앤비에 있다. 어린 시절 라디오에서 미국 가수 오팅스 레딩의 노래 ‘디즈 암스 오브 마인’(These Arms Of Mine)을 듣고 흑인 음악에 매료된 그는 1993년 자작곡으로 채운 1집을 발표하며 한국에 알앤비라는 새로운 장르의 물결을 일으켰다. 이 음반 타이틀곡 ‘그대의 향기’는 훗날 후배 가수 휘성, 김범수, 환희 등에게도 영향을 줬고, 1996년 나온 유영진 2집은 벅스와 힙합엘이가 함께 선정한 ‘한국 알앤비 명반 50선’에 거론됐을 만큼, 한국 알앤비 시장에서 유영진의 존재감이 상당했다. 자신 음반뿐 아니라 유영진이 작곡하거나 프로듀싱한 곡에서도 알앤비에 뿌리를 둔 노래가 많다. 그는 그룹 S.E.S.의 데뷔곡 ‘아임 유어 걸’(I’m your girl)에 뉴잭스윙을 가져왔고, S.E.S. 4집에 실린 ‘비 내추럴’(Be Natural)에선 네오 소울을 시도했다. 유영진과 디오의 듀엣곡 ‘텔 미’(Tell Me)는 발표된지 5년이 지난 최근까지도 팬들 사이에서 꾸준히 회자되는 알앤비 명곡. 창법이 비슷해 부자지간으로도 불리는 유영진·디오의 음색을 구분해 듣는 것도 이 곡을 즐기는 감상법이 될 것이다.
함께 들으면 좋은 노래: 슈퍼주니어 - ‘쏘리 쏘리 – 앤서’, SM 더 발라드 제규종지 - ‘핫 타임즈’, 레드벨벳 아이린&슬기 - ‘몬스터’
wild37@kukinews.com / 사진=SM엔터테인먼트 제공, 유튜브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