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 사회에서 정말 능력만큼 보상받는가? 언뜻 보면, 맞는 거 같다. 우리나라는 시가총액 상위 30개 기업 임원의 25%가 소위 '스카이(SKY)대학' 출신이다. 이 점을 보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더 보상을 받는다는 원칙이 틀리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소위 스카이(SKY)에 운 좋게 간발의 차이로 합격한 학생과 불합격한 학생의 시험 점수 차이는 거의 없을 정도이다. 다만 유일한 차이는 커트라인이다. 그 커트라인 안에 들어가느냐 못하느냐는 인생의 성취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그러니 능력이 아니라, 운이다. 명문대 입학이 고소득자가 될 확률이 훨씬 높다. 이 점을 보면, 사회에서의 보상이 결코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홍콩과학기술대 경제학과 김현철 교수가 소개한 로버트 프랭크 교수의 책 <성공과 운(success and Luck)>(2016)에 따르면,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이 모든 것을 스스로 해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 부작용이 사회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고 보았다. (1) 자기 성취가 스스로 이룬 것이라 믿을수록 세금 납부에 더 적대적이다. 정부와 사회가 도와준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2) 실패한 사람을 운이 나쁘기보다는 노력하지 않은 사람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이들을 돕는 일에 소극적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늘의 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8할 이상이 공동체와 다른 사람 덕분이다. 그러니 겸손할 일이다.
인생의 사는 맛을 활동과 관계가 많고, 잘 이루어지며, 그것들이 의미가 있다면 잘 살고 있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우선을 관계의 폭을 넓게 하고, 그 관계에 충실하며, 끊임없이 접속을 유지하면, 원하는 활동이 확장되는 것을 배웠다.
<주역>의 핵심은 관계론이다. '길흉화복'의 근원은 잘못된 자리에서 비롯된다고 봤다. 내가 있는 '자리', 즉 '난 누구, 여긴 어디'를 묵상하며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어떤 '직위(職位)'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우주 속에서 나의 위치까지 확장되는 용어이다. 한문으로 하면 '위(位)'이다. <주역>에 따르면, 제자리를 찾는 것을 득위(得位), 그렇지 못한 것을 '실위(失位)'라 했다. 득위는 만사형통이지만, 실위는 만사불행의 근원이다. 잘못된 자리는 본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불행하게 한다.
코로나19의 재확산과 무더위로 힘든 때에, 우리 사회는 대선 정국이다. 그 진흙탕 싸움에서 젊은 친구들은 좋은 가치관을 정립하기는커녕 혼란스러워 한다. 대선 후보자들에게 맹자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공유하고 싶다. 벼슬길에 나가는 사람은 자세가 중요하다. 이 문제는 벼슬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로서로 관계를 만들어 가면서, 내가 그 상대에 대한 자세도 마찬가지 문제이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처럼 군자도 도에 뜻을 둔 이상 어떤 경지에 이르지 않으면 벼슬길에 나서지 않는다." 대선 후보이든, 나같은 평범한 사람이든 내 자리를, 내 위치를, 내 웅덩이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말로 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