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본 없는 드라마, 각본 있는 예능 [친절한 쿡기자]

각본 없는 드라마, 각본 있는 예능 [친절한 쿡기자]

기사승인 2021-12-27 19:36:49
조작 논란이 불거진 SBS ‘골 때리는 그녀들’ FC 구척장신과 FC 원더우먼의 경기. 방송화면 캡처.

만년 꼴찌였던 팀이 갑자기 우승을 차지합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명승부 끝에 대역전극이 펼쳐지기도 하죠. 주목받지 못하던 평범한 팀이 어부지리로 상위 리그에 진출하는 일도, 유력한 우승 후보가 예선에서 탈락하는 일도 나옵니다. 온갖 돌발 상황들은 결과가 정해지지 않아 가능한 스포츠의 묘미입니다. 상호존중 하에 모든 이에게 공정하게 펼쳐지는 진검승부. 흔히 스포츠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축구에 뛰어든 여성들의 뜨거운 승부로 화제가 된 SBS ‘골 때리는 그녀들’(이하 골때녀)은 최근 이 근간을 흔들었습니다. 정확히는, 제작진이 스포츠 정신을 어겼습니다. 각본 없는 드라마에 각본을 만든 것입니다. 논란은 지난 22일 전파를 탄 FC 원더우먼과 FC 구척장신의 경기에서 시작됐습니다. 방송에는 FC 구척장신이 전반전에 3골을 먼저 넣고 FC 원더우먼이 바짝 추격해 3대2까지 다다르는 등 박빙의 경기를 펼친 것으로 그려졌으나, 실제로는 FC 구척장신이 전반에 이미 5대0으로 앞섰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일부 시청자들은 감독이 서 있는 위치와 점수판 내용 등이 뒤섞여 있는 것을 근거로 제작진이 전반 5대0에서 후반 6대3으로 끝난 경기를 임의로 조작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논란이 계속되자 제작진은 지난 24일 편집 순서를 일부 뒤바꿨다고 인정하며 사과했습니다. 제작진은 “이번 일을 계기로 예능 재미를 추구하는 것보다 스포츠 진정성이 훨씬 더 중요한 가치임을 절실히 깨달았다”며 “향후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비난의 불길은 중계진에게도 번졌습니다. 이수근과 배성재가 실제 경기 상황과 다른 스코어를 언급한 만큼, 조작을 묵인했다는 비판이 이어진 것입니다. 제작진이 “전적으로 연출진 편집 과정에서 벌어진 문제”라며 재차 입장을 밝히고 배성재가 눈물로 해명했지만 시청자 분노는 식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FC 개벤져스 감독을 맡은 전 국가대표 축구선수 출신 김병지가 유튜브 라이브 방송에서 “조작은 인정 못 한다”면서 “없는 걸 있는 걸로 만든 게 아니다. 편집에 대해서는 사과한다”고 말하며 조작을 방조했다는 지적이 더해졌습니다. 

시청자들은 왜 이토록 분개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만큼 진심이었기 때문입니다. 파일럿부터 시즌 1, 2에 이르기까지 ‘골때녀’ 선수들은 언제나 최선을 다했고, 결과에 승복하며 노력을 거듭해왔습니다. 출연진의 성장에 시청자 역시 울고 웃었습니다. 출연진도, 시청자도 진심이니 제작진도 같은 마음이라 믿을 수밖에요. 특히나 FC 구척장신과 FC 원더우먼의 경기는 순간 최고 시청률이 13.9%(닐슨코리아 전국 기준)까지 치솟을 정도로 많은 관심을 모았습니다. 모두의 눈길이 쏠린 상황에서 조작 논란이 불거진 만큼 실망감이 더 큰 듯합니다. 제작진에 이어 중계진과 감독으로 비난이 이어지는 만큼, 최선을 다한 선수들에게까지 불똥이 튈까 봐 우려된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SBS는 분골쇄신에 나섰습니다. SBS는 27일 “자체 조사 결과 시즌 1, 2 일부 회차의 골 득실 순서가 실제 방송 내용과 다른 것을 발견했다”면서 “책임 프로듀서와 연출자를 즉시 교체하고 징계 절차를 밟겠다”고 밝혔습니다.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오는 29일 방송분은 결방하기로 했습니다. SBS는 “팬들의 성원 속에 성장한 것과 출연진 진심을 잊지 않겠다”면서 “새해에는 더 진정성 있는 스포츠 예능으로 거듭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시청자 반응은 엇갈립니다. 이미 신뢰를 잃었다는 쪽과 ‘골때녀’를 믿어볼 것이라는 의견이 팽팽합니다. 분명한 건, 출연진의 열정과 노력만큼은 절대 조작된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새해에는 진정성 있는 ‘골때녀’를 만날 수 있을까요. 부디, 선수들의 땀과 눈물마저 퇴색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길 바랍니다.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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