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환 리포트] 일상의 영웅

[안태환 리포트] 일상의 영웅

글·안태환 의사, 칼럼리스트 

기사승인 2022-01-06 19:13:11

대개의 사람들은 휘황찬란한 논리보다 서사적 이야기에 마음이 움직인다. 과장된 허상의 이미지인 줄 알면서도 서사적 이야기를 선호하는 이유는 인간의 뇌에 그 해답이 있다. 살면서 터득한 온갖 지식과 기억들은 시간이 뒤엉켰지만 종국에는 살아온 풍경들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기억의 편린들은 대부분 좋은 기억보다 아쉬운 기억이 태반이다. 부족함해서 기인한 관계의 순간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활자의 기억보다 언어의 기억을 유독 오래 갖는다. 저마다의 희망과 불안으로 채색되어 때로는 상처로 때로는 교훈으로 삶을 지배한다. 그래서인지 이루지 못한 꿈이 많은 사회는 소망을 대체할 영웅의 이야기에 열광한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속 영웅들이 대중에게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 속 슈퍼히어로들의 전지전능한 초능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힘이지만 현실에선 실현 불가능한 존재임을 우리 누구나가 익히 안다. 산타클로스의 존재는 동화지만 오매불망 그를 기다리는 동심으로 튼실하게 존재하듯이. 숨이 막히는 코로나19 팬데믹의 시대에 인류를 구원할 담대한 영웅은 오지 않지만 일상 속 슈퍼히어로들은  우리 곁에 백신처럼 존재한다. 보다 현실적이며 체감이 크다. 

코로나 확진자 전담 병동 소속 간호사의 존재가 그랬다. 봄이 여물어 가는 지난 5월 야간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던 그녀는 서울 지하철 9호선 가양역 승강장에서 심정지로 쓰러진 50대 남성을 발견한다. 그녀는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119구급대가 도착하기 전까지의 골든타임 동안 심폐소생술을 실시한다. 끝도 없는 코로나19 의료현장의 최일선에서 지칠 대로 지친 고단한 삶이었지만 이름도 모르는 한 시민의 절박한 긴급 의료 상황에 지체 없이 대응했던 것이다. 응급의료를 이해하는 이들에게는 마블 히어로의 그 어떤 영웅보다 그녀의 존재가 신화적이다. 

뉴스 화면에는 의식을 잃고 쓰러진 남성의 가슴을 압박하고 스마트폰 불빛으로 동공 상태를 확인하는 등 응급처치를 시작한 지 약 1분 정도가 지나자 호흡이 없던 남성은 숨을 쉬기 시작한다. 신고 접수 8분 만에 구급대가 도착했는데, 심정지 환자를 살릴 수 있는 골든타임 4분 안팎을 그녀는 지켜냈던 것이다. 의사의 시선으로 그녀의 과감하고 즉각적인 처치는 결코 쉬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간호사로서 인술을 행하는 그녀의 영웅적 모습은 지구를 구하는 비현실적 영웅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더 크게 움직였을 것이다.       

낯선 주장일 수 있지만 인간의 뇌는 추상적 문제를 이해하도록 진화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개인주의와 자본이 발달할수록 신뢰의 프레임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 유독 집착한다. 그래야만 질서정연해지고 불안정성이 감소한다고 믿는다. 누구나가 규칙적이고 일관성 있는 패턴을 선호하는 배경이다. 선악의 단편적 구분이 그러하고 획일적 잣대로 세상을 재단하는 일들이 만연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게 어디 옳은 일인가. 오만가지의 인간 군상과 생각들이 범람하는 시대에 살며 타인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배려하지 않는 삶이 어찌 평온할 수 있단 말인가.

가족은 가깝고 타인은 먼 사회로 줄달음쳐 가는 한국 사회에서 허용되는 행동과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스스럼없이 자녀들에게 알려주는 생존의 법칙에는‘남의 일에 함부로 끼어들지 말라’는 건조한 교육이 자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이었을 한 시민을 구한 간호사의 행동은 용기였고 배려였으며 사회 공동체와의 교감이었다. 이럴 때‘일상 속 영웅’이라는 호칭은 당연하다.

돌이켜보면 영웅들의 역사는 유구하지만 그 패턴은 오늘 날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모든 영웅들의 이야기는 선이 승리한다는 보편적 진리에 기반한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용기를 낸 자들에게 가혹하며 정의에 대한 책임마저도 지우려 하는 불공정의 사회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가 공정성에 대한 믿음이 뿌리를 내리려면 타인의 삶 또한 보듬을 수 있다는 가치가 존중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첫걸음이다.  

코로나 포비아, 어느새 2년, 신혼여행을 미루고 병원을 지킨 간호사, 사람의 발길도 뜸해진 밤 12시, 지하철을 소독하는 방역원, 연일 이어지는 역학조사로 지쳐가는 공무원, 거리 두기로 단절과 자유를 잃어가는 시민들, 그리고 그 누구보다 힘들었을 소상공인 모두가 잘 버텨내는 새해이길 소망한다. 그러기 위해 일상 속 영웅들이 더 많이 등장해 우리 모두를 위로해주길.  
이영수 기자
juny@kukinews.com
이영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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