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환 리포트] 노스탤지어

[안태환 리포트] 노스탤지어

글·안태환 의사, 칼럼리스트 

기사승인 2022-02-05 16:32:23

언제부터인가 연례행사 같았던 명절 고향 가는 차편을 고민할 이유가 사라졌다. 도로에서 지쳐갈 교통체증을 감수하면서까지 먼 길 운전은 엄두가 나질 않아 늘 대중교통을 이용해왔다. 차편 예약도 만만치 않고 더욱이 원하는 시간을 선택하기도 쉽지 않았다. 자식들을 따라 부모님이 서울로 거처를 옮겨오신 이후부터 해마다 반복되던 고행은 마침내 끝이 났다. 학업을 위해 서울로 상경한 이후, 명절은 고향으로의 강제된 시간이기도 했다. 고단한 일상 속에서 몇 칠을 비워 고향을 찾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나고 보니 이런 핑계는 졸렬했다.

나이가 들어가며 마음속 노스탤지어를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모든 것들이 건조해져가는 중년의 삶 속에서 고향 가는 길은 육신의 고행이 아닌 존재에 대한 연민의 여정이었음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흐르는 것은 시간뿐이 아니었다. 사람도 흐르고 기억도 흐른다. 고향을 떠난 이들은 있었지만 정작 고향은 한결같은 자리에서 유년의 기억을 봉인하고 너덜 해진 인생을 다소곳이 보듬어 주는 위로였던 것이었다. 본디 고향은 그런 것이었다.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모르고 있던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생존의 가치가 우선이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황석영의‘삼포 가는 길’에 등장하는 정씨는 고향 가는 기차를 타지 못한다. 감옥에서 출소한 정씨가 선택할 수 있는 행선지는 고향뿐이었다. 막연한 설렘으로 기차역에 도착한 정씨는 삼포가 과거와 다른 복잡한 도시로 탈바꿈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플랫폼에 들어서는 기차를 타면 고향에 닿을 수 있지만 정씨는 끝내 기차를 타지 못한다. 정씨에게 고향은 상실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소설 속 정씨와 달리 변치 않는 풍경으로 유구하게 존재하는 고향이 있을지라도 고향을 찾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나도 그런 부류일 것이다. 부모님의 부존이 그렇고 딱히 고향에 가서 그리움을 위로할 대상이 없는 경우일 것이다.  

‘노스탤지어(nostalgia)’는‘향수’란 의미이다. 그리스어로 귀환을 뜻하는 노스토스(nostos)와 고통을 의미하는 알고스(algos)의 합성어이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데는 돌아가는 고통이 요구된다는 뜻이다. 체코가 낳은 문호 밀란 쿤데라는‘향수’에서 귀환의 고통을 직시한다. 그도 그럴 것이 조국 체코가 소련군에 점령당한 후 시민권을 박탈당해, 프랑스로 망명한 삶을 살아가는 밀란 쿤데라에게 고향과 귀환, 향수는 그의 삶을 관통하는 대명제였을 것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거대하지만 공산화된 조국 체코로의 귀환에 대한 향수는 고통스러운 감정이었을 것이다. 저마다가 지니고 있는 고향에 대한 향수가 복잡하고 분간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은 고단한 세상살이에서 드러낼 수 없었던 속살의 내면까지 모두 드러낼 수 있는 해방의 공간임은 분명하다. 정서적 안정감과 형언하기 힘든 유대감이 깃든 곳이기 때문이다. 어떤 곳에도 가고 싶지 않고, 아무 곳으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을 때, 속절없이 어른이 되고 세상에 대한 회의주의자로 고리타분하게 늙어간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여전히 가고 싶은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간으로서의 삶은 희망이 깃든다.

고향은 설익은 청춘의 시간이 멈춰서 있으며, 면밀한 관계의 정이 내재된 곳이다. 각기 다른 형태로 사람들 모두에게 형성된 심미의 세계이다. 고향에 대한 마음은  공간이며 시간이며 마음이 불가분의 관계로 굳어진 복합된 심성이다. ‘삼포 가는 길’의 정씨와 망명객인 밀란 쿤데라처럼 갈 수 없다는 현실과 돌아가야 한다는 당위의 간격 속에 고향은 존재한다. 

도시에 살며 고향은 사라져 간다. 그러나 혼돈과 현란의 회색 거리를 걸어가며 스치며 쫓기 듯 살아 내는 일상 속에서 잠시 잊힌 것일 뿐 여전히 뿌리 깊은 나무의 의연함으로 고향에서의 시간은 삶을 지행해준다. 안온한 기쁨을 주고 뿌듯한 생명감을 주어왔던 고향은 이제 부모님의 너무 늙고 가녀린 어깨 뒤로 황혼처럼 저물어간다. 그러나 기차를 타지 못한 정씨의 처지가 아니라면, 해외를 떠돌던 밀란 쿤데라의 고통스러운 향수의 크기가 아니라면 반갑게 맞이할 존재가 굳이 사람이 아니어도 유년의 기억만으로 고향을 찾아가는 시간을 채비해 보는 것, 명절 이후에도 충분하지 않은가. 
이영수 기자
juny@kukinews.com
이영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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