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악의없는 순진무구함이 더욱 잔인하다. 쿠팡플레이 오리지널 ‘안나’의 현주(정은채)가 그렇다. 하루하루 고단하게 살아가는 유미(수지) 앞에서 특히 그랬다. 춥고 우울해서 스파를 하겠다며 유미에게 헬싱키행 항공권을 예약하라던 현주는 말한다. “나 불쌍하지. 행복은 항상 좀 애매하잖아. 근데 불행은 되게 확실하다? 나 요즘 완전 불행해.” 행복에 겨워 자기연민에 가득 찬 현주는, 자각 없이 아무렇지 않게 유미의 마음을 산산조각낸다. 이후 자신의 신분을 도용해 성공을 거둔 유미와 재회한 현주는 말한다. “내 눈에 띄지 말고 계속 계단으로 다녀. 알겠지?” 현주는 끝까지, 어떤 형태로든 유미에게 잔인하다.
‘안나’에서 현주는 극 분위기를 순식간에 바꿔놓는 인물이다. 유미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데다 그의 행동을 도통 예측하기 어려워서다. 지난 7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정은채는 현주에 대해 “똑 부러지는 매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현주를 연기하며 통쾌함을 느낀 순간도 여럿이란다. 정은채는 시나리오를 처음 본 순간부터 현주에게 매료됐다.
“캐릭터 설명에 이런 말이 있었어요. ‘배려도, 악의도 없다.’ 저는 이게 현주라고 생각해요. 단순히 누군가를 곤경에 빠뜨리려는 인물은 아니에요. 예측 불가한 모습으로 상대를 당황스럽게 할 뿐이죠. 현주는 계속 등장하진 않지만, 나올 때마다 주위를 환기하고 분위기를 뒤집는 캐릭터라 생각했어요. 그게 ‘안나’에서 현주로서 해내야 할 몫이기도 했고요. 연기하며 새롭게 채울 부분이 많아 즐거웠어요.”
반응이 뜨거웠다. 신비롭거나 단아한 캐릭터를 주로 맡았던 만큼, 정은채의 연기 변신이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정은채 역시 현주를 통해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말투, 행동, 몸짓과 손짓 등 세세한 부분을 연구하며 자신만의 현주를 만들었다. 이주영 감독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어 가능했다. 정은채는 “감독님은 늘 할 수 있는 걸 마음껏 하라며 무대를 만들어줬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감독님이 현주는 어떤 공간에서도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했어요. ‘촬영장이 네 무대’라고도 하셨죠. 자유롭게 연기할 상황을 만든 뒤 거기서 균형을 맞추는 식이었어요. 촬영 초반에는 현주가 이 세상 사람 같지 않기도 했어요. 목소리 높낮이나 말투, 어법이 사람 성격을 보여주는데, 현주는 늘 들떠있고 붕 떠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공중에 목소리가 분해된다는 느낌으로 연기했어요. 후반부에는 세월 흐름이 느껴지게끔 목소리에 그간 살아온 인생의 무게감을 실으려 했죠.”
‘안나’ 속 인물 중 현주는 욕망하지 않는다. 타고난 부 덕분이다. 기분을 그대로 표출하는 데에도 거리낌 없다. 정은채가 “현주를 연기하는 재미 중 하나”라고 평했을 정도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가세가 기울고 이혼까지 앞두며 현주는 조금씩 초조해진다. 정은채는 “비현실적으로 소중한 게 없던 인물이 딸에게만은 보편적인 정서를 보여준다. 현주의 유일한 숨구멍 같은 순간”이라면서 “시청자들이 현주에게 연민을 느낄 부분이 생겨 다행이다 싶었다”고 회상했다. 현주가 가장 큰 감정의 진폭을 보여주는 건 유미와의 재회다.
“보통은 자기 삶이 도용당한다는 생각을 잘 안 하잖아요. 심지어 그 일을 벌인 게, 현주의 인생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던 유미예요. 충격이 어마어마했을 거예요. 현주 입장에선 고작 유미 정도 되는 사람이 이런 만행을 저지른 거죠. 유미에 대해 곱씹어보긴 했겠지만, 그러면서도 유미를 벌 줄 생각은 없었을 거예요. 현주는 응징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돌려서 위기를 모면하는 데 집중하는 사람이니까요.”
화려한 의상과 자신만만한 표정, 여유가 느껴지는 제스처까지. 정은채는 그 자체로 현주였다. 캐릭터 구현에 대한 걱정은 이주영 감독의 확신을 만나 말끔히 사라졌다. 유미에게 계단으로 다니라며 손짓을 하는 동작을 즉흥적으로 넣는 등 여러 애드리브를 가미하며 인물에 입체감을 가미했다.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없는데, 있다면 돈이 부족해서 아닐까’, ‘엘리베이터 타지 말고 계단으로 다녀’ 등의 대사는 현주를 잘 보여주는 대사로도 통한다. 정은채는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이 말과 현주의 퇴장 신을 꼽았다.
“현주는 유미와 애초부터 같은 공간에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폐쇄적인 작은 엘리베이터에서 유미와 공존하는 게 현주 입장에선 불쾌한 거죠. 유미가 아무리 이안나 교수로 성공해도 현주에겐 그저 옛날의 유미니까요. 현주가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맨발의 유미를 내려다보는 구도도 둘의 신분 차이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에요. 안나라는 이름을 안 쓰게 된 일을 이야기하는 현주의 마지막 장면도 정말 인상 깊었어요. 현주를 관통하는 대사죠. 이걸 향해 왔다고 느낄 정도예요. 대사를 내뱉으면서도 문장을 음미했던 기억이 나요.”
애플TV+ ‘파친코’에 이어 또 한 번 변신에 성공했다는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해외 활동 계획에 대해 묻자 “어디서든 저를 보여줄 준비는 돼 있으나 해외 진출을 목표로 삼고 연기하진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시간이 지나봐야 알겠지만 ‘안나’가 전환점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을 잇던 정은채는 길게 나아가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전했다.
“‘파친코’에 이어 ‘안나’에도 좋은 반응을 보여주셔서 감사했어요. ‘안나’를 신선하게 봐준 분들이 많아요. 작품이 오래 남아야 캐릭터도 사랑받고 그다음 기회도 열리잖아요. 삶은 기회의 장이라 생각해요. ‘안나’의 현주처럼, 제가 할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던 연기를 하며 너른 시야와 여유가 생기길 바라요. 이런 경험이 쌓이다 보면 좋은 걸 알아볼 수 있는 지혜로운 배우가 될 수 있겠죠? 꼭 그러리라 믿고 싶어요.”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