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적이되 자연스러운 사람. 배우 서현우는 영화 ‘유령’(감독 이해영)의 천은호 캐릭터를 이렇게 회상했다. 천은호는 ‘유령’의 전반전을 책임지는 인물이다. 호텔 시퀀스에서 그의 존재감은 빛을 발한다. 그는 분위기를 환기시키면서도 전체 톤을 해치지 않는다. 감초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유력한 용의자로서도 기능한다. 지난 17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서현우는 “도전정신으로 임했다”며 지난날을 돌아봤다.
서현우는 이해영 감독과 영화 ‘독전’ 이후 두 번째로 호흡을 맞췄다. 감독의 권유로 시나리오를 읽은 뒤 그는 여러 생각에 잠겼다. 작품은 재미있지만 천은호 계장을 표현하는 건 어려워 보였다. 독립운동에 사명감을 가진 이와 그렇지 않은 이들. 비장한 분위기 속 천은호의 역할이 어렵게만 느껴졌다. 걱정을 멈춘 건 매력 있는 캐릭터 덕이다. 서현우는 이해영 감독과 함께 천은호가 어떤 인물일지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어느 정도로 표현해야 ‘유령’에서 천은호가 잘 존재할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자연스럽게 스며들면서도 연극적인 느낌을 살려야 했어요. 극에 몰입감을 해치지 않으면서 용의 선상에 오른 의뭉스러움까지 표현해야 했고요. 관객들에게 천은호가 감초로만 느껴지면 존재감이 그대로 휘발될 수도 있었거든요. 평범한 듯 비범한 인물, 모두가 진중할 때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쉬어갈 인물이 돼야 하는 게 임무였죠. 감독님과 연기 톤을 절충하며 함께 만들어갔어요.”
천은호는 독특한 인물이다. 섬세하고 날카로운 암호계장이면서도 애묘인이자 주술에 심취해 있는 엉뚱한 면을 가졌다. 똑똑한 괴짜다운 모습을 살리는 것에 주력했다. 준비 단계부터 세세한 동작과 안경, 콧수염 등을 세심히 설계했다. 일부러 통통한 몸에 꽉 달라붙는 슈트를 입었다. 안에선 밀어내려 하나 겉으로는 억제하는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서다. 서현우는 “특수임무를 맡은 기분으로 천은호를 다져갔다”며 이 감독과 스태프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그동안 강렬한 배역을 여럿 맡았지만, 천은호 같은 캐릭터는 처음이었어요. 연기를 위해 고안한 여러 질감들을 현장의 많은 분들이 잘 담아주셔서 감사했죠. ‘유령’을 촬영하며 배우라는 직업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새삼 느꼈어요. 준비한 걸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모두의 수용을 거쳐 함께 만들어가는 작업이더라고요. 각 스태프에게 어떤 부분이 감사한지 구체적으로 느꼈어요. 같은 학교 선후배 사이인 (박)소담이, 존경하는 설경구 선배님과 함께한 순간도 잊히지 않아요. 감동의 연속이었어요.”
지난해에만 일곱 작품을 선보인 서현우는 차츰 인지도를 높여가고 있다. 작품마다 상반된 이미지를 보여주며 연기 변신에 능하다는 칭찬도 들었다. “얼마 전부터 저를 알아보는 분이 생기시더라고요.” 쑥스러워하며 웃는 얼굴에서 행복이 느껴졌다. 단역, 조연을 거쳐 주연까지 맡으며 시야를 넓혔다. “과거에는 맡은 몫만 해내고 퇴근하기 바빴다면, 이제는 제작 상황이 보여요. 인물로서 호흡하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현장과 작품을 더 많이 연구하고 생각해요. 완급조절은 중요하지만 아직은 신기하고 어려워요. 물론, 그래서 더 재밌죠.”
매 작품에서 다양한 변신을 감행하다 보니 자연스레 부담이 뒤따른다. 가능한 한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고 싶다는 욕심은 그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배우생활을 해나가며 또 다른 꿈이 생겼다. “배우끼리 경험을 공유하는 장을 만들고 싶어요. 요즘 캐릭터에 이입하는 법과 잘 빠져나오는 법을 연구하고 있거든요. 많은 작품이 쏟아지면서 배우들의 일감도 많아졌어요. 하지만 과거 캐릭터를 다 떨치지 못한 채 새로운 캐릭터를 만나면 무게감에 짓눌릴 수밖에 없어요. 이런 경험을 공유하는 스튜디오를 만드는 게 꿈이에요.” 이야기를 이어가는 서현우의 눈이 반짝 빛났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고의 세월을 버틴 그다. 빛을 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신을 추월한 사람을 볼 때면 속이 쓰리기도 했다. 부침을 겪으며 인생의 진리를 깨달았다. “사람마다 시기와 인연이 다 다르다고 생각해요. 저는 늘 기다리는 사람이에요. 잠깐의 인기에 취하려 하지 않아요. 어려웠던 과거를 높이 평가하지도 않아요. 계속 나아가는 게 제게는 더 중요하거든요.” 진중하게 말을 잇던 서현우는 ‘돌이 구르기까지 이끼가 낄 시간이 필요했다’는 동료 배우 이하늬의 말을 인용하며 덧붙였다. “저 역시도 녹록지 않은 시간을 보냈어요. 그러면서 느꼈죠. 덕지덕지 낀 이끼가 큰 힘이 된다는 걸요. 앞으로 해나갈 일이 더 많아요. 제게 낀 이끼는 저를 더 잘 굴러가게 하는 자양분이에요.”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