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히어라는 얼마 전 지하철을 탔다가 믿지 못할 광경을 봤다. 같은 칸에 승객 대부분이 스마트폰에 얼굴을 묻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더 글로리’를 보는 모습이었다. 당시는 ‘더 글로리’ 파트2가 공개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지척에 이사라(극 중 김히어라가 맡은 배역)를 두고도 화면 안에 빠져 있다니. 김히어라는 웃으며 말했다. “신기했어요. 한두 명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이 ‘더 글로리’를 보고 있었거든요. 많은 분들이 파트2를 기다리셨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닿았어요.”
‘더 글로리’는 김히어라의 삶을 흔들었다. 과장이 아니다. 2009년 뮤지컬 ‘잭 더 리퍼’ 앙상블 배우로 연기를 시작한 그는 요즘 어딜 가나 사람들에게 주목받는다. ‘더 글로리’에서 길게 늘어뜨렸던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는데도 “뒷모습만으로도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했다. 김히어라는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도 눈도장을 찍었다. 지난 6~12일 ‘더 글로리’ 글로벌 시청 시간은 무려 1억2446시간. 같은 시기 집계된 넷플릭스 TV 시리즈 시청 시간 가운데 가장 긴 기록이다. SNS 팔로워 수는 ‘더 글로리’ 공개 전보다 다섯 배 가까이 늘었다.
“근로소득세 내는 넌 모르는, 종합소득세 내는 세계가 있단다.” 스튜어디스 최혜정(차주영)에게 이렇게 빈정거리는 이사라는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학교폭력 가해자와는 다르다. 마약에 절여져 정신이 온전치 못한 데다, 신에게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광기처럼 가졌다. 김히어라는 이사라를 “나른한 고양이 혹은 뱀” 같은 캐릭터로 흡수했다. 아슬아슬할 만큼 자유로운 이사라를 표현하려 ‘노브라’로 촬영했고, 담배 피우는 법도 배웠다. 미술에 조예가 깊어 전시회도 열었던 그는 그림을 통해서도 이사라를 이해했다. 자신이 그린 그림 안에서 이사라를 표현할 단서를 찾아갔다.
“벌거벗은 내가 화장과 장신구로 치장된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었어요. 그때 그림을 시작해서인지 여성 누드화를 자주 그려요. 그림(사진 맨 왼쪽)에서 여자는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요. 담배 연기를 보면 숨을 쉬는 듯한 기분이 들거든요. 가슴에 까만 건 멍(왼쪽에서 두 번째)이에요. 멍을 확대하면 제 일기가 되는 거고, 그 일기를 또 확대하면 불안한 심리가 드러나죠(왼쪽에서 세번째). 이 모든 걸 담아낸 게 마지막 그림(맨 오른쪽)이에요. 가운데 제가 있고 그 주변엔 다양한 시선들이 있어요. 이 그림들을 감독님께 보여드렸어요. 사라도 그림 속 여자와 비슷할 것 같았거든요. 단약 상태일 때,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와 헤쳐나갈 수 없는 심정을 거칠게 표현한다고 생각했어요.”
김히어라는 ‘더 글로리’를 위해 두 달간 100호(가로 162.2㎝·세로 130.3㎝)짜리 그림도 세 점 그렸다. 화가들이 마약에 중독된 상태로 그린 그림을 연구해 완성한 작품이었다. ‘작품에 넣기엔 너무 디테일하다’는 안 감독 판단에 드라마에 쓰이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 그림들을 작업실에 고이 보관해뒀다. 이름 없는 단역을 거쳐 기대주로 우뚝 선 그에게 그림은 또 하나의 탈출구다. “그림은 일종의 일기예요. 남들에게 들킬까 두려운 저의 초라한 모습을 표현하거든요. 그래서인가 봐요. 제 동료들 혹은 제 뮤지컬을 본 관객들이 제 그림을 보면서 많이들 우시더라고요. ‘아프다’는 이야기도 많이 하시고요.”
안방극장에선 떠오르는 신예로 평가받지만, 사실 김히어라는 무대 연기에 잔뼈가 굵다. 특히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마리 퀴리’, ‘유진과 유진’ 등 여성 서사를 다룬 작품에 특히 자주 얼굴을 비쳤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배우 송혜교는 ‘더 글로리’에서 김히어라와 처음 함께 촬영하는 날 ‘공연 배우들에게 칭찬 많이 들었다. 나는 받아주는 쪽이니 마음껏 연기하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김히어라는 “혜교 언니는 동은 그 자체”라며 “동은의 미세한 떨림, 한 번도 남을 해쳐본 적 없는 사람의 공격성 같은 것들이 나를 더 사라답게 만들었다”고 회상했다.
벌써 ‘올해 최고의 발견’으로 평가받는 김히어라의 다음 행보는 tvN ‘경이로운 소문’ 시즌2. 그는 중국에서 건너온 악귀 겔리를 맡는다. 쏟아지는 관심에 들뜰 법도 한데, 김히어라는 “오히려 더 차분하고 냉정해진다”고 했다. 그는 요즘 자신에게 자주 묻는다. ‘네게 벌어질 일들을 감당할 준비가 됐니.’ 질문에 답을 구했냐고 물었더니 “완벽히 준비된 상태가 어떻게 가능하겠냐”는 반문과 함께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저의 미성숙했던 순간들, 제가 겪었던 시행착오들이 결국 제 재료가 되는 것 같아요. 돈이 없어서 했던 아르바이트부터, 사람에게 상처 주고 상처받은 경험, 또 이별들…. 그런 모든 경험이 지금의 배우 김히어라를 만든 것 같아요. 말하자면 저는 계속 (지금을 위해) 준비해온 셈이에요. 어쩌면 지금 제게 찾아온 영광(더 글로리)도 저를 준비시키는 과정인지도 몰라요. 제가 좀 더 커지도록, 더 많은 것들을 책임지고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도록.”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