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청춘, 독립운동가, 서번트 증후군을 앓는 피아니스트, 트랜스젠더, “너 때문에 고생깨나 했지만 그래도 너 없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며 몸을 날리던 순정파 범죄자…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 박정민에게도 영화 ‘밀수’(감독 류승완)는 쉽지 않은 기억으로 남은 작품이다. 그가 극 중 연기한 장도리는 뱃사람다운 외형이 도드라지는 인물. 바다사나이인 장도리는 감초 역할을 넘어 갈등 구조에서도 제 몫을 다한다. 개봉 후 관객 사이에서 신 스틸러라는 호평이 잇따를 정도다.
자신이 출연한 작품을 보기 전엔 늘 떨린다는 박정민. 그는 이번 ‘밀수’를 보면서 언제나처럼 덜덜 떨다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현장에서의 즐거운 추억 덕이다. 지난 24일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난 박정민은 “촬영장에서 감독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이 재밌었다”며 추억을 회상하기 바빴다. 그는 류승완 감독의 러브콜을 받고 ‘밀수’에 합류했다. 장도리는 지금까지 그가 맡은 역할과 상반된다. 소란스러우면서도 과격하고, 세심하기보다는 둔탁하다. “어떤 면을 보고 장도리를 제안하셨는지 궁금했다”고 돌아보던 그는 “이유를 물어보면 하기 싫냐고 하실까봐 아직까지도 못 물어봤다”며 웃었다.
박정민은 장도리가 되기 위해 보이는 모습부터 바꿨다. 체중을 늘리자 생김새는 금세 바뀌었다. 넙데데한 얼굴에 삐쭉 올라간 눈초리, 바삐 굴러가는 눈동자. 장도리의 외면을 갖추니 자신감은 자연히 붙었다. 류승완 감독과 김혜수의 도움이 컸다. 이들이 찾은 의상과 분장 자료를 더해 구불구불한 머리에 구레나룻을 기른 장도리가 탄생했다. 박정민은 “거울만 보면 신이 났다”고 돌아보며 “장도리의 모습을 한 것만으로도 큰 무기를 얻은 기분이라 편하게 연기했다”고 만족스러워했다. 장도리의 내면을 탐구하는 건 오롯이 자신이 할 일이었다. 박정민은 그의 생존본능을 눈여겨봤다. “자아를 형성하기 전에 몸이 자라 눈앞의 이익을 좇다 그릇된 선택을 하는 인물”이라는 설명이다.
‘밀수’에서 장도리가 빛나는 장면은 단연코 권상사(조인성)와의 맞대결이다. 그에게 선배 배우 조인성은 든든한 산과 같았다. “계산하지 않아도 (조)인성이형 앞에서는 날것의 모습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며 당시를 떠올리던 그는 “권상사의 액션신에 장도리가 조금 껴드는 정도다. 감독님이 시키시는 대로 연기했다”고 했다. 장도리는 물속에서 춘자(김혜수)·진숙(염정아)을 비롯한 해녀들과도 다툰다. 박정민은 “준비를 많이 해갔는데 생각보다 분량이 적더라”며 “물속에서 묘기를 부리기도 했다. 돌아보면 즐거운 기억뿐”이라며 밝게 미소 지었다. 유리잔을 씹어버리는 장면 역시 재미난 추억으로 남았다.
돌이켜 보면 장도리는 박정민에게 일탈로 작용했다. 박정민은 “실제 나는 말없이 무던하고 평온하다”면서 “장도리를 연기하며 실컷 화내본 것 같다”고 했다. 실제와 다른 인물을 구현하면서도 마음이 편했던 건 현장에서 함께한 동료들에게 한마음 한뜻으로 응원을 받은 덕이다. 그의 심경 변화도 주요하게 작용했다. 그간 박정민은 스스로의 자아를 배우라는 틀에 가두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을 우선순위에 놓는 법을 배웠다. 혼자 답을 찾으려고 애쓰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모두에게 기대며 정답을 풀어간다. “준비는 철저히 하되 그게 전부는 아니란 걸 깨달아서”다.
마음을 풀어두니 카메라 앞에서도 편해졌다. 최근 들어 유튜브 콘텐츠에도 자주 얼굴을 비추는 것도 이래서다. “모든 배우가 관심을 원하잖아요. 저라고 왜 아니겠어요. SNS를 하다 문제가 생길까 봐 참는 것뿐이죠. 그러다 침착맨을 만난 거예요.” 그는 요즘 침착맨(웹툰작가 이말년)의 유튜브에 종종 출연하며 입담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도 여럿이다. “배우라는 이유로 몸을 사리는 게 하잘것없이 느껴지더라고요. 이 순간 내가 행복한 게 우선이란 걸 느꼈어요. 행복이 제 직업에 지장을 주는 것도 아니거든요. 소중한 직업이지만, 개인적인 행복이나 삶의 방향성을 가로막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생각이 바뀐 계기는 전쟁 같은 30대 초반을 겪으면서다. 그의 배우 인생을 바꾼 영화 ‘동주’(감독 이준익)를 만난 이후였다. 염세적이던 청년은 바빠진 삶에 쫓기듯 살고 마음고생을 겪으면서 달라졌다. ‘잘 돼야 행복한 것’이라던 생각은 ‘마음이 편해야 행복한 것’으로 바뀌었다. “마음을 고쳐먹으니 일이 더 잘되고 재밌어요. ‘난 왜 저렇게 못 해내지’라는 생각도 이제는 하지 않으려 해요. 작품도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으로 찾아보곤 해요.” 채찍질을 거두니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박정민은 “영화를 준비하고 대하는 태도부터 다르다. 나 자신을 괴롭히고 학대하지 않는다. ‘그래도 된다’고 말해준다”면서 “편해진 스스로를 인지할 때면 저절로 행복해진다”고 했다. 그런 마음으로 임한 게 ‘밀수’다. 관객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박정민은 소탈하게 웃곤 답했다.
“참 재밌죠? 단편영화만 찍으면서 겨우 배우 생활하던 사람이 여름 주요 영화에 출연해서 선배님들, 감독님과 무대인사를 다닌다뇨. 상상도 못 하던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이 자체만으로도 정말 신기해요. 영화가 재밌을 테니 꼭 보란 말은 안 할게요. 관심만 가져주세요. 재미있게 찍은 게 느껴지실 겁니다.”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