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표현력 있고 다채로운 작품과 다사다난했던 삶은 전 세계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영감을 준다. 반 고흐가 그림을 그린 기간은 단 10년(1880~1890)이었고, 그 동안 유화 900여 점과 1,100여 점의 스케치를 그렸다. 전반기 5년은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그가 그림을 배우고 습작을 하는 시기임을 감안할 때 불꽃처럼 타오르며 ‘영혼과 생명을 바쳐 그림을 그린 화가’였다.
그의 예술은 여러 세대의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살아 있다.
녹색 눈, 빨간 수염, 이랑 눈썹, 파란 작업복, 때론 모자를 쓰고 있거나 그가 가장 좋아하는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는 것이 그의 자화상의 특징이다. 반 고흐의 자화상을 보면서 우리는 그 예술가와 대면한다.
그러나 반 고흐의 자화상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색, 붓질, 그리고 얼굴 표정의 연구를 위한 습작이었다.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는 18점의 자화상이 소장되어 있다.
반 고흐 미술관에 있는 자화상은 한 작품을 빼고 전부 화가로서의 자화상이며 그는 이젤을 앞에 두고 확신에 찬 예술가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중에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 이젤 앞에서만 약간의 생명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서양미술사에서 자화상은 두가지 부류로 나눠진다.
북유럽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화가인 알프레히트 뒤러(Albercht Durer, 1471~1528)의 자화상이 ‘예술을 하는 화가로서의 존엄성’을 중요하게 강조하고 나타냈으며,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로 이어지는 나르시시즘(Narcissism, 자기애)적인 자화상이 한 축이다. 그리고 네덜란드 바로크를 대표하는 빛의 마술사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뒤를 이은 반 고흐처럼 자아를 성찰하는 부류의 자화상이 다른 하나이다.
동생 테오(Theo)에게 보낸 반 고흐의 편지를 보면, 그는 27살이 되도록 제대로 된 직업을 찾지 못한 채 실패를 거듭하며 제 앞가림도 못할 정도로 돈도 벌지 못한 불행하고도 힘겨운 삶을 살고 있다고 스스로 인정한다. 경제적인 문제만이 아니고 사회성도 떨어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충동적이고 무모한 행동을 벌인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반 고흐는 화가의 길을 선택했고, 그 길을 가지 않으면 실패자가 된다고 자신을 다그친다. 반 고흐의 집안에는 정신병과 우울증의 가족력이 있고 자신이 계획했던 일을 마치지 못하면 스스로 밖에 나가 서 있는 벌을 받을 정도로 강박증이 심했다. 테오가 보내주는 생활비로 화구를 구입하고 모델료를 지급하고 나면 한 달에 겨우 두어 번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었으니 항상 건강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처럼 무엇인가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은 부주의해지기에 이따금 엉뚱하거나 충격적이어서, 반 고흐의 행동은 관습과 예절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그의 '영혼의 편지1, 2'를 읽다 보면 한양대 정민 교수의 책 '미쳐야 미친다'가 절로 떠오른다. 예를 들어 반 고흐가 외모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외모 가꾸는 일을 경멸해서가 아니라 한마디로 돈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가장 심오한 실존적 감정을 직접적이고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타낼 수 있도록 새로운 종류의 표현 방식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한 예술가였다.
“테오에게, 지금 내 작품이 팔리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언젠가는 거기에 사용된 물감보다, 그리고 내 인생보다도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라고 쓴 1884년 10월 24일 편지에서 우리는 투철한 예술가로서의 창의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회색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에서 반 고흐는 자신의 이미지를 활용해 다양한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파리의 코르몽(Fernard Cormon) 화실을 함께 다닌 하트릭은 "빈센트가 다른 사람보다 옷을 잘 입었다"고 회고했다. 파리에서 점묘법으로 표현하는 쇠라(Geoges Seurat)와 시냑(Paul Signac)을 자주 만나면서 색채와 빛에 대해 네덜란드 시절보다 더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창의적이고 회화적인 기법을 작품에 적용하며 점점 나아졌다. 그리고 반 고흐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긴 색선(色線)을 이용하여 자신 만의 기법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배경에 후광처럼 그려진 원형이 그림에 역동성을 부여하기 시작했다.네덜란드 시기의 대표작인 '감자 먹는 사람들' 같이 어두운 그림을 그리는 반 고흐에게 동생 테오는 "파리에 와서 당시 새로운 사조이며 밝고 화려한 색으로 그림을 그리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보고, 또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낭만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보아야 한다"고 편지를 보냈다.
테오의 권고에 따라 반 고흐는 파리에 왔고, 그와 처음 만난 장소도 루브르였다. 반 고호는 그곳에서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의 색조에 매료되었다.
1884년부터 이미 그는 “색채가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라고 테오에게 편지를 썼으며 쿠르베의 초상화조차 사실주의가 아니라, 영혼의 표현을 나타내는 데 주력한 표현주의적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사물의 외면을 묘사하는 인상주의와는 대립되는 모습을 보인다.
파리 시기는 반 고흐의 생애에서 가장 많은 작품이 그려진 시기이다. 반 고흐의 작품 시기는 크게 네덜란드 시기와 프랑스 시기로 구분하고, 프랑스 시기는 체류했던 도시에 따라 파리, 아를, 오베르쉬르우아즈 시기로 세분한다.
파리 시기 2년 동안 25점 자화상 포함하여 230점을 그렸으며 그의 전 생애에 걸쳐 그린 자화상은 90점이 된다.
파리 시기는 네덜란드에서 다른 사람의 얼굴 형태를 오랫동안 연구하며 터득한 필치를 기반으로 자신의 얼굴을 주제로 선택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