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79년 뉴욕타임즈 인터뷰와 YH 사건으로 국회의원에서 제명된 후 남긴 말로 본인의 정치철학을 나타내고 있다. 여야와 정부는 김 전 대통령 서거 9주기를 맞아 ‘김영삼 정신’을 이어간다고 했지만, 현 정부와 정치권 모두 개혁의 원동력인 ‘시대정신’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22일 서울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9주기 추모식’에서 정치인들은 김 전 대통령을 ‘개혁가’로 평가했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영원한 의회주의자 김 전 대통령은 투사이자 개혁가”라며 “민주주의를 찾기 위해 불꽃처럼 싸웠고 이를 지키기 위해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개혁했다”고 말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도 “영원한 민주주의자 김 전 대통령은 그야말로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 투쟁은 오롯이 국가와 민족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며 “대도무문(大道無門)은 김 전 대통령의 휘호로, 옳은 일을 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는 것을 본인의 삶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하나회 척결과 금융실명제 개혁을 통해 국가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강화하는 업적을 이뤘다”며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한 마디는 김 전 대통령의 굳센 의지와 불굴의 희망을 상징한다”고 전했다.
“개는 짖어도 기차는 갈 수밖에 없다”…김영삼 ‘불굴의 개혁’
김 전 대통령의 키워드는 ‘개혁’으로 이를 해내기 위해 민주주의와 국민을 시대정신으로 내세웠다. 문민정부는 △하나회 숙청 △금융실명제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지방자치제 △고용보험 △민주주의 시대 개막 등 당시 시대상으로 하기 어려운 일들을 해냈다.
당시 금융실명제가 도입되면 금융시장에 혼란이 생겨 ‘나라가 망한다’는 말이 돌았다. 그러나 우려한 바와 다르게 혼란은 크지 않았다. 1993년 8월 13일부터 10월 12일까지 계좌 실명전환은 97.4%에 육박했다. 금융실명제는 지금까지 지하경제로 인한 부정부패를 방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회 안전망인 고용보험도 도입 초기에 국가 재정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우려와 다르게 고용보험은 도입 직후 1997년 외환위기(IMF)를 맞아 실업자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또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의 일환으로 취임 첫 해인 1993년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된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를 지시했다. ‘5·18 특별법’도 제정해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통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구속했다.
이 같은 개혁으로 김 전 대통령은 현재 대한민국의 사회시스템의 초석을 쌓은 대통령으로 평가받았다.
尹 정부, 4대 개혁 ‘시대정신’ 원동력 부족
윤석열 정부는 4대 개혁(교육·노동·연금·의료)을 내걸었지만, 이를 뒷받침할 ‘시대정신’을 꺼내지 못했다. 결국 윤석열 대통령 지지율은 20%대로 내려 앉아 동력을 잃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비슷한 수준의 대규모 개혁을 진행한 김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와 다른 결과다.
임기반환점을 돈 윤 정부는 4대 개혁을 완수해 민생을 안정화하겠다는 전략을 내세웠다. 그러나 각 개혁을 살펴보면 갈 길이 멀다. 의료개혁의 경우 8개월 간 의료공백이 발생한 상태에서도 의료계와 합의점을 찾지 못하는 상태다. ‘여야의정 협의체’에서도 협의가 2025학년도 의대정원을 두고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연금개혁에서는 보험료율을 13%로 늘리고 소득대체율 42%를 유지하는 ‘정부 단일안’이 나왔다. 그러나 22대 국회에서 여야의 대결구도가 더 첨예해지면서, 정부 단일안은 정치권 논의 테이블에도 올리지 못하는 상황이다.
노동개혁은 파업에 따른 ‘노동손실일수’ 감소를 성과로 공개했다. 그러나 사측과 노동조합의 갈등, 조직화되지 못한 중소기업 노동자 권리 등 핵심적인 문제를 짚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교육개혁 역시 ‘인공지능(AI) 디지털 교과서 도입’을 예고했지만, 교권과 학생인권 균형 등 핵심적인 사회 갈등을 해소하는 개혁까지 다가가지 못했다.
최요한 시사평론가는 22일 문민정부와 윤 정부의 ‘개혁’ 차이점으로 ‘시대정신’을 짚었다. 그는 “김영삼표 개혁은 사회시스템과 제도의 기초를 만들었다.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숙청 등 민주주의가 연착륙할 수 있도록 길을 닦은 대통령”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지방자치제, 고용보험도 먼 미래를 준비한 개혁이다. 김 전 대통령의 개혁 원동력은 시대정신을 공감한 국민”이라며 “그러나 현 정부와 정치권은 제대로 된 시대정신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질타했다.
아울러 “국정의 나침판인 시대정신이 없으면 나라는 표류하게 된다. 개혁에는 시대정신이 필요하다”며 “현 정부의 4대 개혁도 국민이 공감할 시대정신을 마련하지 못하면 실패로 끝날 것”이라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