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을 알고 나니 모든 것이 견디기 힘들었어요.”
지난 2017년 ‘후복막 평활근육종’이라는 희귀암을 진단받은 박영분(49)씨는 두 번의 수술과 두 번의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그간 7가지의 항암제를 쓰며 치료를 이어왔지만 완치 불가 판정이 내려졌고, 최근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20대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뜨개질로 인형을 만들어온 박씨는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 호스피스센터에 입원해 그동안 만든 작품들을 전시했다. 함께 지내는 호스피스 환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힘과 희망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난 12일 병실에서 기자와 만난 박씨는 초연한 모습이었다. 병원 호스피스센터가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이 힘겹게 지내는 곳이 아닌, 삶을 천천히 정리하면서 공감과 위로를 나누며 가족 등 남겨질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곳이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평활근육종을 진단받은 뒤 ‘얼마 못 살 것’이라는 병원 교수님들의 말을 들으며 지낸 세월이 어느덧 8년입니다. 순간순간 고비를 넘으며 주변 사람들에겐 정말 괜찮은 척을 했어요. 암이라고 해서 24시간 내내 아픈 건 아니에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일상생활을 보냈어요. 아픈 사람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가장 싫었어요. 살면서 사랑도 많이 받고 일도 열심히 했고 가정도 잘 챙겼으니까 후회되는 게 많지는 않아요.”
대한정형외과학회에 따르면 악성 평활근 종양인 평활근육종은 10만명 중 1명이 진단받을 정도로 매우 드문 암이다. 자궁이나 복강 후복벽, 근육, 혈관 등에 악성 종양이 생기며, 예후가 좋지 않아 연부조직 육종 중 생존율이 나쁜 편에 속한다. 수술로 절제해도 재발하기 쉽다. 박씨는 건강검진에서 암을 처음 발견했다. 수술을 잘 받았지만 암이 전이돼 더 이상 쓸 약이 없을 때까지 항암 치료를 이어갔다. 온몸에 두드러기가 일고, 머리가 빠지고, 청력을 잃고, 이빨이 빠지는 등 치료 과정에서 숱한 부작용을 겪었다.
눈물과 좌절 속 괴로운 시간의 연속이었다. 박씨는 가족들의 지지와 주변의 응원을 받으며 꿋꿋이 버텨나갔지만, 투병 기간이 길어질수록 상태는 점차 나빠졌다. 외로운 삶 가운데 자신과 대화하는 끈이 돼 준 게 그림과 뜨개였다.
“항암 치료를 하면서 시간은 계속 가는데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제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남은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아서 틈틈이 털실로 작은 가방이나 모자, 인형 등을 만들었어요. 호스피스병동에 입원한 다른 환자들이 ‘침대에 누워 지내면서 할 게 없다’며 제 취미생활을 부러워해요. 전시품들을 본 환자와 가족들이 위로를 받았다며 고마워했어요. 이전에는 병동이 어둡게 느껴지고 삭막했대요. 보람 있었죠.”
박씨에게 호스피스병동은 ‘죽음의 문턱’으로 여겨졌다. 임종에 이르는 마지막 길목으로 봤다. ‘죽어서 나가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잠을 편히 이루지 못했다. 공황장애도 겪었다. 그러나 들어와 지내보니 예상했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갇혀 지내는 곳이 아니었다. 의료진과 간병인들의 보살핌 속에서 삶을 따뜻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걸 알게 됐다.
박씨는 후회가 남는 일로 딸에게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한 것을 꼽았다. 박씨는 딸이 대학 입시를 앞둔 19세 수험생일 때 암 판정을 받았다. 엄마를 걱정하다 보니 입시를 망치고, 대학에 들어가선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결혼을 급하게 시킨 게 미안하다고 했다. 특히 신혼집을 같이 못 꾸며준 게 가장 아쉽다고 했다.
“딸이 힘든 시기에 제가 매번 아팠거든요. 엄마가 아프니까 마음 놓고 나가서 놀지 못하고 상처도 많이 받았을 거예요. 지난 4월에 제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니 예식장을 급하게 잡아 6월에 결혼했어요. 엄마가 어떻게 될까봐 항상 불안했을 거예요. 그게 제일 미안해요.”
남편과 부모님이 걱정된다고도 했다. “제가 떠나고 외롭게 남겨질 남편을 생각해요. 남편 덕분에 지금까지 이렇게 버틴 거예요. 우리 신랑이 노년에 외롭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다른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해줬어요. 슬퍼하는 부모님을 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아요. 아프지 않을 때 자주 뵜어야 했는데 후회가 드네요. 남은 시간 동안 부모님과 잘 지내고 싶어요.”
박씨는 숨이 멎는 날까지 후회가 남지 않도록 열심히 살 거라고 했다. “호스피스병동에 들어오면 누구나 다 마음이 아파요. 그 아픈 마음을 못 이겨내고 누워서만 지내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런 분들에게 더 아파지기 전에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충분히 받고, 할 수 있는 일을 많이 해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저도 남은 시간을 최대한 누릴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