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세기 네덜란드 바로크를 대표하는 프란스 할스(Frans Hals, 1580~1666)는 고관, 군인, 학자, 서민, 심지어 집시에 이르기까지 시민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얼굴을 그렸다. 시대를 가리지않고 유화는 부의 상징이었으며, 특히 초상화는 왕과 고관대작 등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황금시대를 구가하는 네덜란드에서는 돈 많은 상인 뿐만아니라 일반시민들도 그림의 주인공이 되었다. 할스가 그린 인간의 밝은 얼굴, 유쾌한 표정 등이 그 시대의 대세였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오르한 파묵은 튀르키에판 <장미의이름>을 집필했다. 그의 대표소설 <내이름은빨강>에 등장하는 16세기 이슬람의 세밀화가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자신의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 금색이 번쩍이는 종교화를 공들여 그렸다. 본을 대고 그림을 그리고 규약에 따라 색을 칠하고 공방에서 찍어내듯이 그렸기에, 굳이 화가의 이름을 기록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르네상스의 초상화를 보게되었는데 그 주인공이 역사적인 영웅이나 신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군주였다. 이후 화가는 자신도 초상화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불경스러운 욕망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화가는 신의 관점에서 그림을 그렸으나 인간의 관점을 중시하는 르네상스화풍이 유입되며 갈등과 혼란이 증폭된다. 문화, 문명 그리고 가치관의 충돌을 아시아와 유럽사이에 위치한 튀르키에의 지리적 조건과 맞물리며 은유와 알레고리로 강렬한타격감을 주는 소설이다.
금속인쇄술과 지리상의 발견으로 지식의 대중화는 1517년 비텐베르크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을 불러왔다. 종교개혁은 중세사회구조, 가치관, 문화현상 전반에 변화를 가져오며 예술의 개인화와 세속화를 더욱 촉발시켰다.
서양미술사에서 17세기 할스 이전에 웃는 그림은 손에 꼽을 정도다.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 웃을 수 없었다. 근대까지도 웃음은 문화적 미발전 단계에서 나타난 ‘흔적’이라 보았다.
웃는 여자 <모나리자>는 상인부인이기에 미소를 지을수있었고, 그런 <모나리자>는유혹하는 여자라는 비난도 받았다. 그후 100년뒤 우리는‘웃는남자’를 할스의 작품에서 만나게되었다. 이는 종교적인 이유와 웃는 표정은 그리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할스는 도시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자부심이 넘치는 민병대원, 자선단체의 남녀 이사들, 평생 독신으로 지내다 전 재산을 구호시설에 기증한 상인, 편안하게 남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웃는 부부, 매력적인 집시 남녀,유쾌한 그저그런 술꾼, 해맑게 웃는 소년 등을 그렸다. 즉, 할스의 초상화 주인공은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사회의 일원이었다.

민병대원은 이미 술이 얼근하여 눈은 풀리고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투명한 버키마이어를 내밀며 술을 권하고 있다. 할스는 이전의 경직된 자세와는 달리 활발한 태도로 살아있는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기분 좋게 취한 술꾼은 할스의 빠른 붓놀림으로 거친 붓터치를 드러내며 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할스는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거침없이 그려, 힘있는 필치로 인해 마치 스케치 같은 즉흥성을 보여준다. 그는 얼굴과 손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빠르게 그렸다.
그래서 그의 화풍은 19세기 중반 마네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새로운 표현기법을 찾고 있던 인상주의 화가들의 존경을 받았다. 할스의색채는소박하고두드러지지않으며, 인물을부각시키기위해세부묘사가강조되고있다.
그래서 더욱 실제로 움직이는 것처럼 브라브라(bravura) 화풍의 예술적 기교를 구현해 매우 인기가 있었다. 일상의 순간을포착한 인간미 넘치는 초상화는 17세기 황금시대의 분위기를 대변해 준다. 이 그림은 사방으로 뻗어 나간 주문자의 머리카락과 수염만큼이나 자유롭다.

이 술꾼은 페켈하링(Pekelharing)으로, 코메디에 등장하는 삐에로나 아를르캥처럼 그 시대 무대 캐릭터다. 이는 극심한 갈증을 일으키는 네덜란드 특산물인 ‘소금 청어’로, 짜디짠 안주는 술을 부르기에 전형적인 술꾼 캐릭터이다. ‘내가 술을 마시는 이유는 안주가 짜기 때문이다’라는 귀여운 변명을 하고 있다.
테이블에 곰방대, 연초, 화로, 이쑤시개 같은 불쏘시개가 있는 걸 보니, 그는 주정뱅이에다 골초다. 다 마신 빈 술병을 확인하는 페켈하링은 종종 그림에 등장한다. 이 시기엔 술과 담배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즐겼다.
레이스테르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화가였다. 할스의 제자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는 이유는 그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한때는 할스의 딸이었다는 오해도 받았다.
레이스테르의 아버지는 물이 맑기로 유명한 하를렘에서 ‘레이스테르(북극성)’ 맥주 양조장을 운영했기에 딸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북극성’이란 길을 안내해 주는 지표가 되는 별이다. 레이스테르는 1633년 하를렘의 세인트 루크 길드에 화가로 등록하여, 스튜디오에서 수많은 도제를 키운 극소수의 여성화가들 중한 명이었다.


무려 18개의 붓과 팔레트를 들고 ‘예술을 창조하는 예술가’라는 자부심이 넘치는 자화상을 그렸다. ‘메리 컴퍼니’를 그리는 화가를 누가 부르기라고 한 듯, 문에 들어서는 누군가를 반갑게 맞이하려 몸을 돌리고 있다. 파안대소 하는 화가와 캔버스의 그림이 서로 비슷한 표정이지만 완벽하게 자연스럽지는 않다.
화가가 평소 저런 옷을 입고 작업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칼라와 소매를 장식한 시스루 레이스가 팔을 걸친 의자와 대비되며 투명함의 극치를 뽐내고 있다. 아무래도 여성 화가의 섬세함이 여기서 빛을 발한다. 둥근 레이스 칼라는 레이스테르의 얼굴로 시선을 집중하게 만드는 장치다.

강렬한 색채와 붓놀림으로그린 ‘즐거운사람’들이 당대의 유행이었다.
분홍색 깃털부터 온통 핑크인 남자 역시 한손엔 술잔을, 다른손에는술병을들고있다. 요즘엔 핑크가 여자아이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지만 이시절엔 남자아이들의 색이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데 음악이 한몫 한다. 창에서 이들을 바라보는가족으로 보이는 세사람도 매우 흥겹다.
테이블위에 올려진 술병은 떨어질듯 위태롭다. 이는 경고의 메세지다. 지나친 음주가무는 경직된 캘빈교도의 가치관에용납되지 않으니절제하라는 뜻이다.
할스처럼 즉흥적이고 데생없이 그리는 법으로 빛과 어둠의 극적인 효과를 사용하여 이미지의 감성적인 부분을 강화하고 있다. 가족들이 함께 음악을 즐기는것은 17세기에 부부, 친구, 가족의 사랑과 화합에 대한 일종의 은유다.
결혼전 레이스테르는 실력도 인정받고 헌사도 받았다. 그러나 이런 재능도 하를렘의 동료화가 얀민센 몰리나르와 결혼하며 잊혀진다. 아마 남편의 작업장에서 계속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러나 경단녀가 되어 200년동안 완전히 사라졌다.
레이스테르의 별이있는사인 ‘JL*’은 프란스 할스의 ‘FH’로 가필되어 할스의 작품으로 팔려나갔다. 그러나 이후 레이스테르의 작품임이 밝혀지자 오히려 작품가격은 떨어졌다. 할스만큼 뛰어난 또다른 화가를 발굴했다고 기뻐하기는 커녕 할스의작품이 아니라고 인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도제는 마스터의 집에서 몇년간 생활하며 그림을 배워야 했기에 아버지나 오빠가 화가가 아니고는 여성은 엄두를 내기도어려웠다. 레이스테르는 그런 척박한 시절에 북극성처럼 빛나는 화가였다.

최금희 작가는 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미술 사조, 동료 화가,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를 문학, 영화, 역사, 음악을 바탕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현재 서울시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