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제조업의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을 목적으로 마련한 배출권거래제의 유상할당 비중을 대폭 상향하는 방안을 추진하면서 불황을 겪고 있는 철강업계의 볼멘소리가 나온다.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려는 취지엔 동의하나, 규제 수준의 유상할당 비중 상향에 초점이 맞춰지기보단 제도 개선이 동반돼야 한다는 관점에서다.
9일 제조업계에 따르면, 환경부·기획재정부 등 정부는 배출권거래제 제4차 계획기간(2026~2030년)을 앞두고 배출권 유상할당 비중을 높이겠다는 내용을 담은 기본계획을 지난해 12월 확정했다. 배출권거래법(온실가스 배출권의 할당 및 거래에 관한 법률)에 따라 세부 할당비율 등 구체적인 내용을 올 상반기 내 수립할 계획이다.
지난 2015년 도입돼 시행 10년을 넘긴 배출권거래제는 일정량 이상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사업장이 온실가스를 배출할 권리를 시장을 통해 거래할 수 있도록 한 제도로, 유상 또는 무상으로 할당한다. 할당량 이상의 온실가스를 배출하려면 배출권을 구매하고, 여유분은 시장에 판매하는 방식이다.
정부는 제도 시행 초기였던 1·2차 기본계획 당시엔 업계 부담을 고려해 유상할당 비율을 3%로 제한했으며, 올해 종료되는 3차 기본계획(2021~2025년)에는 평균 10%로 상향했다. 이후 내년부터 적용되는 4차 기본계획에선 30% 이상을 고려하고 있다. 발전사업자에 할당된 100개의 배출권 중 30%가 유상할당이면, 사업자는 70개를 무상으로 지급받는 대신 30개를 경매방식으로 정부에게 돈을 내고 구매하는 형태다.
철강업계에선 급격한 상향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 지난달 21일 김완섭 환경부 장관 주재로 열린 제4차 기후전략간담회에서 산업계 대표 격으로 참석한 포스코홀딩스의 김성준 탄소중립전략실장은 “포스코 연간 영업이익이 1조5000억원인데 현재 배출권 구매 부담 순비용이 4000억원”이라며 “유상할당 비중이 늘면 구매 부담 순비용은 배로 늘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상할당 확대가 철강업뿐만 아니라 자동차, 건설 등 연관 산업의 원가 경쟁력을 동반 약화시킬 수 있다”고 덧붙였다.
여타 철강업계에서도 부담 가중을 우려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철강업계 관계자는 “배출권거래제에 따른 탄소저감 노력을 지속해 왔고 궁극적으로 수소환원제철 등 기술을 통해 탄소 다배출 업종인 철강업의 탄소중립이 달성될 수 있어야 하겠지만, 급격한 유상할당 비중 상향이 현재 불황을 겪고 있는 업계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경제인협회가 에너지경제연구원에 의뢰해 지난달 발표한 ‘배출권거래제의 전기요금 인상효과’ 보고서에 따르면, 정부가 돈을 받고 판매하는 배출권의 유상할당 비율을 현행 10%에서 50%로 올릴 경우 전자·통신, 자동차, 화학, 철강 등 제조업 전체 전기요금이 연간 약 5조원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만약 50% 유상할당과 배출권가격 3만원을 가정으로 계산할 때 철강업계는 연간 3000~4000억원의 인상분을 부담해야 할 것으로 전망됐다.

‘높은 무상할당 비중’ 실효성↓…“단순 상향 외 유인책도 必”
정부는 그간 무상할당 비중이 높아 배출권가격이 평균을 밑돌면서 제도 도입의 취지가 옅어졌다는 입장이다. 배출권거래제 운영결과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배출권 최종할당량 5억7910만톤 중 무상할당량 비중이 무려 99%에 달했다. 경매 활성화를 위한 목적이었으나 오히려 정부가 할당해 준 허용량이 지나치게 많아 남아도는 배출권이 시장에 싼값에 나왔고, 기업에서 탄소감축에 비용을 들이는 것보다 일단 온실가스를 배출한 뒤 시장에서 싼값에 배출권을 구매하면 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실제로 지난해 1~8월 배출권 평균 거래가격은 톤당 9167원으로, 거래제가 시행된 2015년 7860원에서 2019년 4만950원까지 올랐다가 다시 1만원 안팎으로 떨어졌다. 지난해 3분기 유럽연합(EU) 배출권 평균 거래가격에 비하면 10분의 1도 되지 않는 수준이다.
기후솔루션 등 환경단체에서도 그간 한국형 배출권거래제의 높은 무상할당 비중이 탄소 감축이라는 본연의 목적을 저해하고 있다고 지적해 왔다.
다만 업계에선 갑작스런 대폭 상향이 아닌 점진적 상향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미국의 관세 조치와 더불어 산업용 전기요금 상향 등 업황이 지속적으로 악화할 전망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경매수익으로 마련한 기후대응기금의 활용 강화, 인센티브 확대 등 제도 개선도 동반돼야 한다는 목소리다.
한국경제인협회는 “기업은 배출권거래제 의무 참여에 따라 부족한 배출권을 구매해야 할 뿐만 아니라 발전부문의 유상할당 비율 확대에 따른 전기요금 부담도 감내해야 한다”며 “특히 유상할당에 따른 경매수익이 기후대응기금 재원으로 활용되는데, 이것이 소규모 및 단기성 사업에 활용돼 실질적인 온실가스 배출저감 효과가 낮다는 문제 제기가 나오는 만큼 이에 대한 해결책이 동반돼야 한다”고 말했다.
2023년 독일은 에너지 요금 부담 절감을 위해 2028년까지 최대 280억 유로에 달하는 전력 요금 패키지 도입에 합의했으며, 일본도 2023년부터 kWh(킬로와트시)당 0.9~3.5엔에 달하는 기업의 전기요금 보조금 지원 사업을 시행하는 등 탄소 저감 정책이 단순히 규제로 여겨지지 않도록 보조 정책을 동반하고 있다.
이상호 한경협 경제산업본부장은 “배출권거래제가 기업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인센티브를 기반으로 감축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제도로 전환돼야 한다”며 “탄소중립과 지속가능한 경제를 실현할 수 있는 탄력적인 기후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