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약사가 신약을 개발했음에도 한국 출시를 꺼리거나 공급을 중단하는 이른바 ‘코리아 패싱’이 이어지고 있다. 혁신 신약에 대한 낮은 약가 책정, 허가에 필요한 까다로운 규제 등 이유는 다양하다. 약이 없어 환자 치료에 차질을 빚는 일이 없도록 신속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대원 대한뇌전증학회 이사장(삼성서울병원 신경과 교수)은 20일 서울 용산구 드래곤시티호텔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세노바메이트’(미국 제품명 엑스코프리)라는 약은 뇌전증 치료의 ‘게임 체인저’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한 약인데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않았다”며 그 원인에는 한국의 낮은 약가 등 여러 정책적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뇌전증은 뇌신경세포에 과도한 전류가 흘러 반복적으로 신체 경련발작이 발생하는 뇌질환이다. 국내 뇌전증 환자는 약 36만명으로, 이 중 70%는 발작을 억제하는 항경련 약물을 투여해 조절이 가능하다. 나머지 30% 정도는 약물을 투여해도 경련발작이 재발하는 ‘약물 난치성 뇌전증’ 환자에 해당한다.
SK바이오팜이 자체 개발한 세노바메이트는 약물 난치성 뇌전증에서도 효과를 보여 현존하는 뇌전증 치료제 중 가장 우수한 효능을 가진 약물로 평가받고 있다. 임상 3상시험 분석 결과에 따르면, 세노바메이트를 복용한 환자 28%는 발작이 완전히 사라지는 ‘완전발작소실’을 보였다. 기존 뇌전증 치료제들의 완전발작소실 비율은 3~4%에 불과하다.
세노바메이트는 2019년 11월 미국 식품의약국(FDA), 2021년 1월 유럽의약품청(EMA)의 허가를 받아 해외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지만, 국산 신약임에도 정작 한국에선 허가조차 받지 못했다. 국내 생산 및 판매를 담당하고 있는 동아에스티는 2월20일 식품의약품안전처에 세노바메이트 품목허가를 신청했다. 식약처에 따르면 세노바메이트는 3월7일 ‘글로벌 혁신제품 신속심사’(GIFT) 품목으로 지정된 상태다. 최종 허가 여부는 올 3분기 확정될 전망이다.
국산 신약이 국내에 출시되지 않은 것을 두고 서 이사장은 제약사 탓만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서 이사장은 “세노바메이트 뿐만 아니라 다양한 약들이 한국에 안 들어오고 있다. 다국적 제약사의 좋은 약들의 수준을 우리나라가 맞춰주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코리아 패싱이 반복되는 창피한 상황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신약 도입 지연 문제 해결방안으로 약가를 신속하게 심사하는 ‘패스트 트랙’ 제도 도입, 경제성 평가 방식 개선, 정책적 유연성 확보 등을 제시했다.
반복되는 의약품 코리아 패싱을 근절하기 위해 전문학회와 언론의 역할이 강화돼야 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구대림 뇌전증학회 총무이사(서울시보라매병원 신경과 교수)는 “약가가 정해지기 전까지 의약품 공급 업체에 전문학회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없어 코리아 패싱을 원천적으로 막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서 “환자의 삶의 질을 크게 개선시킬 수 있는 약이 나오면 계속 이슈가 되고 홍보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며, 그 역할을 학회와 언론이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