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이 있다가도 며칠 지나면 없어요. 약을 구하려면 다른 약국들과 경쟁해야 하는데 진짜 박 터집니다.”
서울의 한 약국을 운영하는 약사 A씨는 출근하자마자 약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한다. 약이 없으면 재고가 소진되기 전에 서둘러 주문을 넣는다. 적은 수량이라도 약을 확보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생산이 중단돼 구할 수 없는 약은 어쩔 도리가 없다. 의약품 품절에 따른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들이 떠안게 된다. 반복되는 의약품 수급 불안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3일 쿠키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의약품 수급 불안정 장기화로 인한 약국과 의료 현장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지난달 대한약사회가 패널약국 500곳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최근 약국 운영에 영향을 준 변화’를 묻는 질문에 약사 134명이 ‘지속적 품절약 문제’를 꼽았다. 약을 구하기 위해 발품을 파는 일은 일상이 됐다. ‘과거와 비교할 때 약사의 역할이 어떻게 달라졌나’라는 물음에 ‘행정업무나 품절약 구입 등 비임상적 업무가 많아졌다’고 답한 약사가 156명으로 가장 많았다. 약사 55명은 ‘환자에게 약 품절에 대해 설명하고 조제 지연으로 양해를 구할 때’ 하루 중 가장 피로감을 느낀다고 했다.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의약품 공급 부족 문제가 극심해졌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공급이 중단됐거나 부족한 의약품은 2014년 57개에서 2023년 265개로 4.7배 급증했다. 반드시 구비해야 하는 국가필수의약품도 예외는 아니다. 2020년부터 지난해 7월까지 5년간 총 108개의 국가필수의약품 공급이 중단됐다. 국가필수의약품이란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자연재해나 감염병 유행 등의 상황에서도 안정적으로 공급될 수 있도록 정부가 직접 관리하는 의약품을 말한다. 지난해 말 기준 총 473개 품목이 국가필수의약품으로 지정된 상태다.
원료의약품 자급률 25.6%…대부분 인도·중국 수입
의약품 품절 문제는 불안정한 원료의약품 수급과 관련이 있다. 국산 원료의약품 자급률은 2023년 기준 25.6%에 불과하다. 식약처의 ‘2024년 식품의약품 통계연보’에 따르면, 2023년 국내에 수입된 원료의약품은 총 21억9904만달러(한화 약 3조원) 규모다. 이 중 중국·인도산 원료의약품 수입액은 11억376만달러(약 1조5000억원)로, 전체 수입액의 절반가량을 차지했다.
이란·이스라엘 분쟁 등 국제 정세 악화와 고환율 기조가 이어지면서 원료의약품 수입 의존도가 높은 제약사들의 부담은 갈수록 커진다. 미국의 관세 정책은 불확실성을 더 키우고 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최근 발간한 ‘글로벌 바이오헬스산업동향’에 따르면, 세계무역기구(WTO)는 고조되는 통상 마찰로 올해 전 세계 상품 무역량이 0.2% 감소하고, 이는 의약품에 간접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제네릭(복제약) 생산·수출을 확대하고 있는 인도와 전 세계 원료의약품의 주요 공급지인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며 한국이 직·간접적 영향을 받고 있다.

낮은 약 가격, 불합리한 규제도 문제로 꼽힌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에 따르면, 그동안 정부가 마련한 약가 사후관리제도만 10개에 달한다. △동일 제제 등재 시 약가를 깎는 ‘제네릭 약가 인하’ △기관·기업 간 실제 거래 의약품 가격을 조사해 약가를 매기는 ‘실거래가 약가 인하’ △급여 적용 유지를 논의하는 ‘급여 적정성 재평가’ △적응증 추가에 따라 약가를 내리는 ‘사용범위 확대 협상’ 등이 운영되고 있다. 특히 안정적 건강보험 재정 관리와 국민 의약품 접근성 강화 등을 이유로 시행되고 있는 ‘사용량·약가 연동제’에 대한 제약사들의 불만이 적지 않다. 사용량·약가 연동제는 약이 얼마나 쓰이는지에 따라 가격을 조정하는 방식이다. 약가 협상을 거쳐 건강보험에 등재된 의약품이 제약사가 처음 제시한 예정 사용량보다 30% 이상 많이 팔릴 경우 약가를 인하한다.
제약 업계는 “약 판매량이 늘면 오히려 가격 인하 부담으로 되돌아와 제약사들의 연구개발(R&D) 의지를 꺾어 버린다”고 지적한다. 한 제약사 관계자 B씨는 “국민 건강을 증진시키는 효과 좋은 약은 제값을 주고, 그렇지 않은 약은 가격을 인하하거나 퇴출하는 게 상식적일 것”이라며 “의약품 판매 수익 중 상당 부분이 R&D에 재투자되는데, 정부의 약가 정책은 이를 저해하는 규제 덩어리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여기에 더해 정부는 해외 8개 선진국 약가와 국내 의약품 가격을 비교해 재평가하는 제도도 추가 도입할 것으로 알려져 업계의 시름이 깊어진다.
“정부, 의지 갖고 의약품 공급망 강화 정책 추진해야”
의약품 공급 부족은 환자 피해로 이어진다. 최근 맥널티제약의 임신성 당뇨 진단약인 ‘글루오렌지’의 생산이 중단되면서 전국 산부인과가 혼란을 겪었다. 당뇨병이 없던 여성이 임신 중에 혈당 수치가 올라 당뇨가 생기는 것을 ‘임신성 당뇨’라고 한다. 임신성 당뇨를 방치하면 태아가 사망할 수도 있다. 앞서 회사는 지난 3월과 5월 두 차례 식약처에 공급 부족을 보고했다. 원료 제조원 변경으로 인한 품절 이후 공급이 일시 재개됐으나, 추가 원료의 공급이 지연되면서 생산 일정이 미뤄졌다. 예정 공급 시기는 6월 말이다.
지난해 11월엔 JW중외제약과 유한양행이 생산 중인 ‘옥시토신’의 공급이 끊겼다. 옥시토신은 자궁 수축을 일으켜 분만을 유도하거나 산후 출혈 방지제로 쓰는 약물이다. 인도에서 원료를 수입하고 있었는데 공급 일정에 문제가 생기며 생산이 중단된 것이다. 영국 GSK(글락소스미스클라인)의 소아 천식 및 만성 폐쇄성 폐질환(COPD) 치료제인 ‘벤토린네뷸 2.5㎖’는 공급 부족 문제가 끊이지 않고 있다. 벤토린네뷸은 국가필수의약품이자 퇴장방지의약품으로 지정된 상태로, GSK는 재공급 시점을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의약품 공급망 강화를 위해 국내 원료의약품 생산 기업에 대한 지원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연홍 한국제약바이오협회 회장은 17일(현지시간)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2025 바이오 인터내셔널 컨벤션’(바이오 USA) 기자간담회에서 지난 2021년 중국의 요소 수출 중단으로 발생한 요소수 사태를 언급하며 “이와 유사한 공급 리스크가 제약산업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노 회장은 “중국·인도 원료의약품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공급망 자립 전략은 산업 생존과 국민 건강권을 위한 핵심 과제”라며 “국제 정세와 무관하게 정부가 의지를 갖고 의약품 공급망 강화를 위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제약사의 공급 재개와 증산을 지원해 안정적 의약품 공급망 구축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최근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은 보령의 담즙산 결합수지 계열 고지혈증 치료제인 ‘보령퀘스트란현탁용산’(성분명 콜레스티라민레진)을 ‘수급 불안정 의약품 생산 지원사업’ 첫 대상으로 선정했다. 이 치료제는 산모와 소아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고지혈증 치료제로, 2023년 채산성 악화로 공급이 중단됐다. 이후 환자들은 해당 의약품을 한국희귀필수의약품센터를 통해 복잡한 절차를 거쳐 해외에서 개별 구매해왔다. 정부가 지난해 4월 필수의약품으로 신규 지정했음에도 생산은 재개되지 않았다. 보령은 이번 사업을 통해 해당 의약품의 국내 생산·출시를 연내 재개할 예정이다.
제약 업계는 지원사업 확대와 더불어 약가 규제 완화, 국산 원료의약품에 대한 약가 우대 등이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업계 관계자 C씨는 “원료의약품 생산 기업들의 노후화된 제조 설비 교체·정비 지원 등을 통해 생산능력을 끌어올려야 한다”면서 “낮은 채산성에 따른 수급 문제 안정화 전략이 제시되고, 업계를 옥죄는 낡은 규제가 철폐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