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원, 어린이음료 17개 품질 조사 “추천할 제품 없다”
취학 전 아동, ‘캐릭터 마케팅’에 취약…엄마들 “불만”
기업은 ‘윤리적 가이드’, 소비자는 ‘권리’ 세워야
[쿠키 사회] 서울에 사는 승민(5·남), 승훈(2·남) 형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엄마를 졸라 동네 슈퍼마켓의 어린이음료 코너를 들른다. 특히 동생 승훈이는 원하는 제품을 사주지 않으면 진열대 앞에서 떼를 쓰기 일쑤다. 엄마 이선애(36·여) 씨는 “아이들이 어린이음료를 워낙 좋아해 사주고는 있지만 건강에 해가 되는 건 아닌지 늘 걱정된다”고 말했다.
많은 엄마들이 이 씨처럼 아이의 건강을 염려하면서도 어린이음료를 구입한다. 찜찜한 마음 한 구석에 ‘어린이 전용 음료’인 만큼 함부로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5월 한국소비자원이 발표한 ‘어린이음료 품질 정보’에서 확인된 현실은 엄마들의 작은 기대마저 꺾어 버렸다. 소비자원이 대형할인점에서 유통 중인 어린이음료 17개 제품을 분석한 결과 모든 제품이 당을 주성분으로 하고 있었으며, 산도는 탄산음료의 pH 2.4~3.3과 비슷한 수준인 pH 2.7~3.8 수준으로 나타났다.
◇ 산도 낮고 당이 주성분…설탕 대용 ‘액상과당’은 더 해로워
과도한 당분의 섭취는 칼로리 과잉을 불러와 비만으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에 성장기 어린이 건강을 생각한다면 당을 주성분으로 한 음료 섭취는 자제시키는 것이 좋다. 이대목동병원 소아청소년과 서정완 교수는 “당분이 주성분인 음료를 즐겨 마신다면 비만아가 아니더라도 필요한 칼로리를 당분만으로 섭취하는 것과 같아 단백질이나 칼슘 같은 성분들이 부족해 영양의 불균형이 온다”고 조언했다.
설탕보다 값이 저렴하고 감미도가 1.4배가량 높아 설탕 대체물질로 사용되는 액상과당은 건강에 더 해롭다. 포도당과 과당이 결합돼 있는 설탕이 건강에 해로운 이유는 분해과정이 간단해 인체에 빨리 흡수되기 때문인데, 액상과당은 포도당과 과당이 분리되어 있어 설탕보다 흡수가 더 빠르다. 인하대학교 의대 직업환경의학과 임종한 교수는 “액상과당이 인체에 들어왔을 때 지방으로 축적되는 과정이 더 쉽고, 포만감을 느끼게 하는 식욕억제 호르몬에 영향을 줘 과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취재진이 대형할인점 세 곳에서 많이 팔리고 있는 어린이음료 9개 제품을 구입해 원재료를 확인해 보니 하나 같이 액상과당을 사용하고 있었다.
◇ 어릴 때 입맛, 성장 뒤 성인병 부를 수도
어린이가 당분이 많이 첨가된 음식을 주의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어렸을 때부터 단맛이 강조된 간식을 즐겨 먹는다면 성인이 되어서도 올바른 식습관을 유지하기 어렵다. 수원대학교 식품영양학과 임경숙 교수는 “아이가 단맛만 선호할 경우 담백한 음식보다는 당이 들어간 빵이나 과자를 먹으려 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입맛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며 “이런 경우, 고당질·고지방 식사를 선호하게 되면서 비만 등의 각종 성인병 위험률이 높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식약청은 어린이 기호식품 가운데 열량은 높고 영양은 낮아 비만이나 영양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제품을 고열량·저영양 식품으로 분류해 관리하고 있다. 어린이 식생활안전관리 특별법 고시에 따르면 음료의 경우, 1회 제공량의 당 함량이 17g을 초과하고 더불어 단백질 함량이 2g 미만이면 고열량·저영양 식품에 해당된다.
기준이 정해져 있는 만큼 해당 제품들에 대한 규제도 뒤따라야 하지만 현실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 어린이가 TV를 시청하는 주시간대에 제품 광고를 제한하고, 학교 매점에서 판매할 수 없도록 한 것이 규제의 골자이지만 소비자가 주의를 기울이거나 문제의식을 갖기엔 한계가 있다. 동네 편의점과 슈퍼마켓, 대형할인점을 비롯해 어린이들은 일상 곳곳에서 고열량·저영양 제품에 노출돼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원이 품질조사를 벌인 대형할인점의 어린이음료 17개 제품의 경우 단백질이 들어 있는 제품은 단 한 개 제품이었고, 4개 제품에서는 식약청 기준을 초과한 당 함량이 확인됐다.
◇ 치아 건강에 ‘적’…‘푸쉬-풀’ 뚜껑 세균번식 원인되기도
설탕이나 액상과당 같은 당분이 비만이나 영양불균형과 관계가 있다면 청량감을 주기 위해 일정 수준으로 낮춘 산도는 어린이 치아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낮은 산도의 음료를 먹고 입안이 pH 5.5 이하 상태로 유지될 경우 치아의 보호막이 손상돼 충치가 발생하기 쉬운 환경이 만들어 진다. 산도가 낮은 음료를 먹은 후 바로 이를 닦는다면 치아의 손상 정도를 더 키울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 고려대학교 구로병원 치과 이의석 교수는 “산도가 낮은 음료를 먹은 뒤에는 보호 작용을 하는 침이 충분히 활동할 수 있도록 여유를 두고, 물로 입안을 골고루 헹궈 준 다음 이를 닦는 것이 치아 건강에 더 좋다”고 전했다.
소비자원이 조사한 17개 제품 중 13개는 일명 ‘푸쉬-풀’ 뚜껑이 부착되어 있는데 음료를 흘리지 않고 먹을 수 있도록 사용하기 편리하게 고안된 뚜껑이지만 위생상의 문제도 함께 안고 있다. 소비자원의 실험 결과 25℃ 상온에서 4시간이 지나자 뚜껑 내부로 들어간 침으로 인해 세균이 번식하면서 초기 부패 상태가 됐다. 한국소비자원 식품미생물팀 홍준배 차장은 “품질을 조사한 17개 음료 모두 산도가 낮고, 일부 상품은 당 함량이 상당히 높아 어린이에게 추천할 만한 제품은 없었다”고 밝혔다.
◇ 어머니 면접설문 “우리 아이, 캐릭터 보고 고른다”
이와 같이 건강과는 거리가 먼 어린이음료가 소비자의 반복적 구매 대상이 된 이유는 아동심리를 공략한 기업의 만화마케팅 기법과 이에 길들여진 소비 패턴에서 찾을 수 있다. 국민일보 쿠키미디어는 전문컨설팅업체와 연계해 서울과 경기도에 거주하는 주부 24명을 대상으로 일대일 면접방식의 ‘어린이음료 인식 경향’ 설문을 진행했다. 한 그룹 당 8명 씩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진행한 설문내용과 오디오 녹취 기록에서 맥락과 경향성을 찾는 질적 분석을 벌였다.
그 결과 소비자들은 ‘자녀들이 만화캐릭터를 보고 음료를 선택한다’고 생각했고, 음료 구입 시 자녀의 선호를 더 우선시하는 소비 경향을 보였다. 2차 그룹의 문미경(44·여) 주부는 “음료를 구입할 때 자녀의 선호를 존중하는 편인데, 아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만화캐릭터를 기준으로 음료를 고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건강과 캐릭터는 구입 기준과 불만 사항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었다. 3차 그룹의 최미숙 주부(45·여)는 “아이들은 캐릭터음료를 보면 먹고 싶어서라기보다 습관적으로 마시는 것 같다”며 기업이 음료 포장 용기로 아이들을 현혹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내비쳤다.
건강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특정 영역을 지칭한다기보다 ‘아이에게 나쁘지 않거나 좋은 효과’라는 차원에서 사용하는 경향성이 발견됐고, 이러한 특징은 다시 기업의 자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이어졌다. 1차 그룹의 배정선(36·여) 주부는 “소비자가 일일이 따져 보지 않아도 생산자가 양심껏 아이들이 마시기에 적합한 원료를 사용해서 제품을 생산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 어린이 음료 선택 실험…10명 중 7명 캐릭터음료 골라
어린이의 음료 선택 경향을 파악하기 위해 별도로 진행한 실험관찰 조사에서는 4~7세 미취학 아동 10명 중 7명이 액상차나 과일주스, 탄산음료 등을 제치고 캐릭터음료를 골랐다. 이화여자대학교 심리학과 양윤 교수는 “아동들은 제품에서 TV 속 만화 주인공을 발견하면 해당 상품을 만화의 연장으로 느낀다”고 호감도가 이어지는 과정을 설명한 뒤 “상품의 질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만화마케팅을 하는 것은 어린이의 취약한 심리를 악용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원하는 제품을 사 달라고 떼쓰는 아이와 거듭되는 자녀와의 실랑이가 귀찮은 부모의 성향이 맞물리면 기업의 마케팅에 휘둘린 소비는 더 늘어나게 된다. 하지만 현행법상 기업의 만화마케팅을 규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식약청 관계자는 “만화캐릭터를 활용하는 것은 기업의 마케팅 영역이기 때문에 통제할 수 있는 근거 자료가 없다”고 밝혔다. 공정거래위원회 관계자도 “허위·과장광고가 아닌 이상 만화마케팅은 규제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소비자가 기댈 수 있는 건 기업의 자정노력 뿐이다. 녹색소비자연대전국협의회 조윤미 본부장은 “기업이 스스로 윤리적 관점에서 개발·판매 등의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취재진이 종합한 ‘소비자 의견’ 음료업체에 전달해 보니…
취재진은 이번 설문조사 결과를 통해 파악된 소비자 경향 및 의견을 어린이음료를 직접 제조하거나 판매하는 업체에 전달할 목적으로 모두 11곳의 기업에 취재협조를 의뢰했다. 이 가운데 촬영을 통해 공식입장을 밝히겠다고 답한 곳은 4년째 어린이음료를 유통·판매 하고 있는 H업체 단 한 곳이었다.
경기도에 위치한 이 업체는 1년 전 건강을 테마로 해 과즙을 50% 함유한 음료를 출시했다. 소비자원 품질정보에서 과·채음료로 분류된 8개 제품의 과·채즙 함량이 10~40% 수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단연 높은 함량이다. 하지만 소비자의 반응은 차가웠고, 업체는 “푸쉬-풀 뚜껑 형태가 아닌 빨대를 꽂아 먹는 형태의 포장용기가 문제의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현재 해당 제품은 판매 중단 위기에 놓여있지만 업체 측은 “소비자들의 의견이나 기호에 따라 제품에 변화를 주는 노력을 이어갈 것”이라고 입장을 분명히 했다.
촬영을 거부한 업체 10곳 중 소비자 의견을 수렴할 의사를 보인 업체 7곳에는 심층설문과 면접인터뷰 등의 조사를 통해 종합한 소비자 개선 희망사항을 이메일로 전달했다. 당 함량과 만화캐릭터 마케팅, 푸쉬-풀 뚜껑 등에 대한 불만사항이 포함됐다. 이에 대해 서면으로 입장을 밝힌 업체 5곳은 공통적으로 소비자들이 요구하는 점이 있다면 “추후 상품 개발에 소비자 의견을 참고 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서면 답변이나 촬영 인터뷰에 응하지 않은 나머지 업체 5곳은 ‘어린이음료가 주력 상품이 아니거나 시장 점유율이 낮다’는 등의 이유로 공식입장 표명을 거부했다.
◇ 어린이 건강 외면한 ‘캐릭터 마케팅’, 규제 방법 없나?
좋은 제품이 세상에 나오고 잘못된 생산과 소비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자정노력과 더불어 소비자의 적극적 의견 개진이 중요하다. 기업은 소비자의 선택을 받아야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한 채 이익만을 앞세우는 기업을 방관할지, 아니면 제품을 비교·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현명한 소비자가 될지는 누구도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기업은 윤리적 관점을 중요시하고 소비자는 소비의 중심에서 소비자의 힘을 발휘할 때 기업과 소비자가 함께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이은선 기자 ujuin25@kukimedia.co.kr
<본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취재·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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