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채윤의 뮤직에세이(3)] 퀸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사소한 것들

[한채윤의 뮤직에세이(3)] 퀸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사소한 것들

기사승인 2013-06-02 15:59:00

[한채윤의 뮤직에세이(3)] 중고등학교 시절 가장 어려웠던 과목은 영어였다. 다른 교과목들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만큼 잘하는 친구들과의 실력 차를 줄일 수 있었던데 반해 영어는 외국에서 살다 온 몇몇 친구들을 보며 마냥 좌절하고는 했다. 불가능의 경지, 상대적 박탈감.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에 만점을 받아도 성적과는 무관한 열등감이 있었다.

대학에 가지 않는대도 당장 딱히 하고 싶은 일이 떠오르지 않았던 터라 진학하기로 마음먹고는 전공을 영어로 정했다. 그곳에 가면 왠지 영어를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Oooooooops! Oh my god!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당시 영문과 신입생 120여 명 중 수능 성적으로 입학한 학생은 나를 포함해 40명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재외국민 혹은 영어 특기자, 그도 아니면 A4 용지 여러 장 분량으로 내가 왜 영문학을 공부해야 하는 지 설명할 수 있는 영어에 특별한 애정과 관심을 가진 학생들이었다.

그러니까 영어를 기본으로 더 나아가 언어와 문학, 문화를 공부하고 싶은 학생들이 모이는 곳이었던 것이다. 뭔가 크게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생각에 그해 봄은 신입생의 풋풋함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시들어 갔다. 영어로만 듣고 말해야 하는 수업은 공포 그 자체였다.

Trifles, 사소한 것들.

셰익스피어, 예이츠, 헤밍웨이... 절반은 원서로 절반은 번역본으로, 아니 솔직히 말하면 한쪽에는 원서를 다른 한쪽에는 번역본을 펴놓고 공부를 했다. 번역본이 없는 작품을 다루는 수업은 아무리 흥미로워 보여도 피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수업 내용을 나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고양이도 죽인다던 호기심 (Curiosity killed the cat, 미국 속담) 따위는 발동하지 않았다. 겁쟁이였다. 고양이에게 잡아먹히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러던 중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번역본을 찾을 수가 없었기에 장인처럼 한 땀 한 땀, 단어의 뜻을 하나하나 꼼꼼히 찾아가며 읽어 내려가야 했던 작품. 그렇게 정성스레 읽어도 그 의미와 내용을 이해하는 건 또 다른 영역이었던 작품. Trifles, 사소한 것들. 수전 글래스펠 (Susan Glaspell, 1882-1948)이라는 20세기 초 미국 여류 작가가 쓴 길지 않은 희곡이었는데, 내용은 대략이랬다.

부인이 남편을 죽인 살인 사건이 벌어졌는데 보안관을 비롯한 동네의 남자들이 단서를 찾는다고 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실과 방을 수색하는 동안 여자들은 하찮은 공간이라고 여겨지는 부엌에서 발견한 사소한 증거들로 살인 사건의 경위를 밝혀내고 남편을 죽인 여자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억울한 정황을 포착해내서 그 증거를 숨기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권선징악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작품이었다.

물론 작가는 훨씬 더 깊이 있는 논의가 이루어질 여지가 충분한 작품을 썼지만 난 여덟 자로 단순하게 기억하고 싶다. 강의 중에는 20세기 초 미국 사회의 남자와 여자의 지위 그리고 페미니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하지만 10년쯤 지난 지금까지도 잊힐 만하면 한 번씩 문득 'Trifles'라는 단어가 또렷하게 기억나도록 만든 건 여성과 남성의 싸움이 아닌 단어 그대로의 의미, '사소한 것들'의 중요성 때문이다.

선생님 말씀, 부모님 말씀을 꽤 잘 들으며 착실한 학생으로 살아왔던 나에게 사소한 것들은 말 그대로 사소한 것일 뿐이었다. 그전까지는 중요한 것들이 중요했고 사소한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소하다고 느껴왔던 것들이 중요해지는 첫 순간이었다. 그 수업 이후 사소한 것들에 목숨 걸며 사느라 지금까지 뚜렷하게 해놓은 것 없이 나이만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진짜 중요한 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놓치지 않는다. 중요한 이슈는 텔레비전과 신문에서 연일 토해낸다. 그런데 오늘 햇살이 좋고 바람이 좋은 건 종종 잊고 산다. 볕이 따뜻한 나른한 오후 함께 책을 읽는 시간, 문득 생각나서 보내는 사랑한다는 문자메시지, 식탁에 둘러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먹는 집 밥. '사소한 것들'이라 쓰고 '소중한 것들'이라 읽는다.

사랑이라는 사소한 것

This thing called love I just can't handle it this thing called love

이건 사랑이라고 하는 것.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

I must get round to it I ain't ready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난 아직 준비 되지 않았지만 사랑이 이뤄졌으면 해. 사랑이라고 하는 사소한 것.

(퀸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1980)

결국 난 졸업할 때까지 부러워하던 그들처럼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지 못했다. 그건 애초부터 불가능 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대신 학년이 올라 갈수록 영문과를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게 되었다. 공교육에 잘 적응해 모든 것에 등수를 매기고 삶을 머리로 이해하던 내가 시를 배우고 고전을 읽으며 사물을, 사람을 가슴으로 느끼게 되었다.

부족한 부분은 채워야 할 영역이지 열등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걸 배웠다. 진심을 담아 글을 쓰고, 뜨겁게 사랑한다. 다른 전공을 선택했더라면 아마 지금만큼의 영어도 하지 못 할 테니 어쩌면 내 인생 가장 잘한 선택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한채윤 / 배우 & 싱어송라이터 서강대학교 영미어문 졸업. 오랫동안 잘 안 팔리는 배우로 지내면서 넘쳐나는 시간 동안 기타도 배우고 피아노도, 노래도 배우다가 이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 해서 어느 날부터인가 곡을 쓰기 시작. 지난 3월 자작곡 미니앨범 '한채윤 첫번째_너무 흔한 이야기' 발매. 여러 편의 단편 영화와 작은 역할로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 대표작으로는 뮤지컬 '심야식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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