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채윤의 뮤직에세이(7)] Meklit Hadero 'You And The Rain', 비와 당신
숨을 쉬면 훅 하고 더운 공기가 밀려온다. 여름이다. 요즘처럼 금세라도 비를 쏟을 것 같은 날씨가 계속되면 다행히 숨쉬기가 조금은 수월해진다. 단, 기분이 축축해 지는 걸 막을 수는 없다. 아무 것도 하기 싫은 날.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콕 집어 말하면 비 오는 날 음악 듣는 걸 좋아한다. 몸에 닿는 비는 그다지. 바라보는 건, 그래도 괜찮다. 빗소리와 멜로디가 섞이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태양은 눈을 즐겁게 비는 귀를 행복하게 만든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와도 환한 날들이 계속 되고 있었다. 와인을 한 잔 했는데 밖이 너무 밝아 당황스러운 적도 있다. 해가 길고 밤이 짧다. 여름이라서 그래. 비가 내리는 날은 낮부터 어둑어둑해 그것도 마음에 든다. 등 대신 초를 켠다.
너는 내가 보고 싶을까
나이가 들면서 사랑한다는 단어는 잘 쓰지 않게 된 것 같다. 그 자리는 보고 싶다, 는 말로 대신한다.
“지금까지 몇 명이나 사랑했어요?”
열을 다 세기도 전에 답이 돌아왔다.
“네 명.“
“나는 아무도 사랑한 적이 없는 것 같아.”
누군가를 보고 싶어 했던 기억은 나는데 그날의 그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의 나도. 기억이 없으니 사랑이었다고 확신 할 수가 없다. 보고 싶다고 백번도 더 말했던 것 같은데. 여자의 사랑은 그런가 봐, 라며 멋대로 결론지어 버렸다.
보고 싶지 않아요
덥고 끈적거려 혼자여도 이렇게 곧 녹아내릴 것 같은데 여름의 연애는 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 분명 우리는 손을 잡고 안기도 했었다. 지금은, 어떤 감각도 그를 기억해내지 못한다. 사랑이 끝나고 시간이 지나면 옅어진다. 사라진다. 어차피 잊을 거 끝나는 즉시 전부 삭제되면 좋을 텐데. 괜한 욕심을 부려본다.
전에 만났던 사람을 우연히 라도 마주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세상 참 좁다, 는 말을 자주 하는데 헤어진 후 한 번도 그를 본 적 없다는 사실이 놀랍다. 비슷한 사람을 보고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은 적은 몇 번 있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게 분명해. 한 때는 그렇게 보고 싶어 했으면서.
라디오를 켠다. 이런 날은 어느 채널이어도 괜찮다. 세상에 딱히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없지만 좋아하는 게 분명한 성격이라 보통은 하나를 고집한다. 하지만 비 오는 날은 예외. 뭐든 다 좋다. 이리 저리 주파수를 돌려본다. 뉴스를 진행하는 그녀의 목소리마저 차분하게 울리는 게 비와 참 잘 어울린다.사진 Paris, 2010
in some countries there are a hundred words for rain
어떤 나라들은 비를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러요
one for the kind it falls slow like pearls
하늘에서 내리는 진주
one for the kind that makes you brave
용기를 주는 무엇
one for the kind it's warm and wide
넓고 따뜻한
one for the kind that smells of new life
새로운 삶의 냄새
one for the kind that pelts and bruises
때리고 상처 입히기도 하는
one for the kind that carries you, carries you, carries you
그리고 당신을 떠올리게, 기억하게 만드는 ...
(Meklit Hadero 'You And The Rain' 2010)
한채윤 / 배우 & 싱어송라이터 서강대학교 영미어문 졸업. 오랫동안 잘 안 팔리는 배우로 지내면서 넘쳐나는 시간 동안 기타도 배우고 피아노도, 노래도 배우다가 이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 해서 어느 날부터인가 곡을 쓰기 시작. 지난 3월 자작곡 미니앨범 '한채윤 첫 번째_너무 흔한 이야기' 발매. 여러 편의 단편 영화와 작은 역할로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 대표작으로는 뮤지컬 '심야식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