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희의 시사소설] 국가정보원장, 국제정세 외면하고 내연녀 품에서 국내정치 조커 카드 내밀어

[전정희의 시사소설] 국가정보원장, 국제정세 외면하고 내연녀 품에서 국내정치 조커 카드 내밀어

기사승인 2013-07-16 17:12:01


[친절한 쿡기자 - 전정희의 시사소설 ‘조선500년 익스트림’] 비변사(국가정보원) 당상 남국정은 인목대비의 정부였다.

인목대비는 선조의 계비로 19세에 왕비가 되었으나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폐모되어 서궁에 유폐되었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 때 일이다. 남국정은 이때 서궁 낭청으로 인목대비 유폐를 지휘했다. 혹여 남인 일파와 끈이 닿아 역모라도 한다면 그대로 모가지가 날아갈 중요한 경계였다.

인목대비는 임진왜란에서도 살아남으면서 오직 일신과 가문의 영달에 급급한 왕비였다. 미색은 빼어나다할 수 없으나 달라붙는 비음으로 선조의 애간장을 녹였다. 게다가 이조좌랑 출신 아버지 김제남이 당대 실력자였기에 책비(冊妃·왕비로 책봉됨)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인목대비는 적통 아들 영창대군을 두었음에도 광해군이 즉위하자 목숨 부지하기 어려운 신세가 되고 말았다. 유폐는 곧 죽음의 날짜를 세는 시간이기도 했다.

내연녀의 눈에 들어 급출세한 국가정보원장

유폐 어느 날이었다. 인목대비가 낭청(郎廳) 남국정을 초라한 서궁 침실로 불렀다. 남국정은 철릭한 채 들어갔다. 인목은 나인을 물리치고 그를 부른 것이다. 그믐께였고, 사위는 조용했다. 인목대비는 남색대란치마를 입고 있었으나 저고리는 속저고리였다.

남국정이 머리를 조아리고 고개를 들지 못하자 보료 위의 인목대비는 나지막이 말을 걸었다.

“고개를 들거라. 나는 폐모된 대비일 뿐이다. 너보다 못한 신세다. 내 술을 한잔 받거라.”

남국정은 어리둥절하여 앞뒤 분간을 못하고 있을 때 인목은 개다리소반을 버선발로 남국정 얼굴 앞으로 밀었다. 불빛에 흔들리는 인목의 얼굴은 고혹적이었다.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에 남국정의 가슴이 쿵덕쿵덕 뛰었다.

한데 인목대비는 사발을 두 손으로 받치고 벌벌 떠는 남국정 잔에 술을 따르며 눈물을 똑 흘렀다. 그 눈물방울이 술잔에 떨어졌다.

“부모 죽고, 자식 잃은 내가 살아 무엇 하겠느냐. 살아도 죽은 목숨이다. 두려울 것도 없구나. 그렇다고 사내를 볼 수 있는 여건이길 하느냐. 살아 낙이 없구나. 그래도 네가 호위해 주니 든든하기 그지없구나. 고맙다.”

“마마, 낭청에 불과한 이놈이 무슨 힘이 있으니이까? 그저 수직 군사 이끄는 미천한 자올시다.”

“그렇지 않다.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다. 네가 아직 천명을 모른다. 연륜이 쌓이면 알 것이다.”

사실 남국정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엄존지하이긴 해도 동기나 다를 바 없었다.

“날이 덥구나. 너희들이 고생이 많다. 내가 외로워 너를 불렀다.”

인목대비는 그러면서 행하를 내렸다. 그러면서 한마디 했다.

“밖에서 수직하는 나졸들도 쉬어 가며 해야 하지 않겠느냐. 너 하나로 이 몸지키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남국정은 인목의 얘기를 바로 알아들었다.

“예 마마, 소인 잠시 물러났다 다시 들어오겠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남국정은 나졸을 멀리 수직 세우고 다시 인목의 침전으로 들었다. 인경(통행금지를 알리거나 해제하기 위해 치던 종) 치는 소리가 밖에서 울림 무렵 대비 침전 불이 꺼졌다. 남국정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애비와 자식 잃은 대비의 통곡소리인지, 아니면 사내 품에 안겨 내는 감흥 소리인지 모를 묘한 울부짖음이 서궁 담 밖을 넘었다.

‘죽으면 어떤가. 왕비 안아본 놈이 조선에 나 하나 밖에 더 있겠는가’

남국정은 대비의 가슴가리개를 거친 손으로 확 잡아당기며 그런 생각을 했다.

조선 최고 여자를 안아봤는데 죽어도 좋아

두어해 후. 남국정은 인조반정이 성공하면서 일약 비변사 당상이 됐다. 그들의 관계는 더욱 밀착됐다. 원수인 광해군 폐위되자 인목대비가 어느 날 남국정 품을 파고들며 말했다.

“내가 친히 그의 목을 잘라 망령에게 제사지내고 싶구나. 쾌히 원수를 갚고 싶구나.”(인조실록)

인조반정에 성공한 서인은 집권 후 친명 정책을 강화했다. 사해정세를 파악하고 후금(훗날 청나라)을 적절히 달래며 활용하던 광해군과 대조적이었다. 그러다 정묘호란으로 후금에 군신의 예를 갖춰야 하는 치욕을 당했으나 대신들은 여전히 입만 살아 아직도 ‘오랑캐’ 운운하며 핏대를 높였다.

세계정세 급변…적국 정보원 광화문에 나타났는데도 음탕질

그 무렵 후금의 장수 용골대가 변장을 하고 광화문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세상이 몇 번씩 뒤바뀌어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서는 후금이 명을 넘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용골대는 변발 대신 상투를 틀고 있었기 때문에 광화문과 종로 저자거리 백성 누구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광화문 앞 육조 거리 수직이나 육모 방망이 들고 거리를 순찰하는 나졸도 용골대와 그 부하 두엇을 함경도 촌것이려니 하고 지나쳤다.

용골대와 그 일행은 갓을 쓰긴 했으나 어딘지 어색해 불심 검문이라도 당하면 그대로 신분이 노출될 상황이었다. 정묘호란 직후 조선은 그만큼 어수룩했다.

용골대는 부하 마부태에게 눈짓으로 경복궁과 육조 등의 지형지세를 파악토록 했다. 도성을 쳤을 경우 조선의 신하들이 인조를 어디로 빼낼지 요로를 알아보는 중이었다.

앞서 1627년(인조 5년) 1월 후금 장수 아민은 3만 명의 군사로 평양을 거쳐 황주, 평산까지 진출했다. 인조는 강화로 도망쳤다.

광화문 앞 관제 데모

용골대가 보기엔 조선은 희한한 나라였다. 그들이 사대하는 명나라는 이미 국력이 기울어 숨을 할딱이고 있는데 조선의 당권파 서인은 자신들을 짐승 보듯 했다. 지금 광화문 앞에서 서인이 동원한 듯한 유생들이 오랑캐 후금과 화친한 것은 짐승과의 화친이라며 군사를 동원, 후금을 멸해달라고 머리를 조아려 주소(奏疏)하고 있었다. 그 수가 수백여 명은 됐다.

주로 불혹을 지난 이들로 복식이 초라했고, 갓끈도 제대로 매지 않았다. 엎드리는 시늉만 했지 서로 농질 하기 바빴다. 서인에 의해 동원된 이들 같았다.

용골대는 뒷짐 지고 그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되 뇌였다.

“한양을 무너뜨리려면 일단 인조의 퇴로를 막아야 하겠군. 양천강(지금의 서울 강서·양천쪽의 한강 지류)을 막고 영서역(서울 대조동·불광동)과 홍제원에 진을 치면 조선은 쪽그물로 들어오는 고기 꼴이다. 분명 강화로 달아나려다 양천강에 막혀 허둥댈 게야.”

사해 질서 바뀐 것도 모르고 사대에 혈안

같은 시각. 조선의 사대와 교린 정책을 맡고 있는 비변사 당상 남국정은 홍제원서 낮술을 하고 있었다. 후금의 정세 보고를 파악한 낭청이 수일 전 밀함으로 후금의 용골대가 변장하고 도성에 잠입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했으나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용골대가 뭐냐? 오랑캐 놈들이라 이름 또한 오랑캐스럽구나. 어디서 족제비나 잡아먹던 것들이 천자가 보호하는 조선을 능멸하려해. 그것들이 압록강 이북에서 벌판을 쏘다니며 방구 꽤 뀐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그들은 사람이 아닌 짐승들이다. 내버려둬라.”

낭청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나긴 했으나 정묘호란의 수치가 재현 될 것 같아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 짐승들에게 ‘군신의 예’ ‘형제의 맹약’을 맺어 굴욕당한지가 엊그제인데 비변사 수장은 안이해도 너무 안이하다.

당장 삼의정(三議政)을 소집해 비변사회의(국가안전보장회의)를 소집해야 할 것 같았다. 병무에 통달한 유사당상(有事堂上·상임위원)만 구성해 놓더라도 그 같은 수모를 또 당하지 않을 것 같았다.

홍제원, 홍제천 계곡에선 여염집 여자 희롱 소리 높아

홍제원은 도성의 진입 길목에 자리한 명 사신을 위한 영빈관이었다. 천자의 나라 사신을 맞는 자리는 경복궁 못지않게 으리으리했고 그들을 위한 관기가 늘 대기하고 있었다. 이날 남국정은 인왕산 서쪽이 보이는 홍제천 명흥루(明興樓)로 원정을 갔다. 정묘년 능욕 직후 황제의 나라 명 좌도독 모문룡에게 여염집 아낙을 동원해 수청 들게 했던 곳이다.

모문룡이란 자는 장수답지 않게 뱃살에 기름기가 잔뜩 낀 인물이었다. 사람 됨됨이가 포악하고 욕심이 많아 다루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홍제원 명빈관에 상다리 부러지는 고기상과 낭창한 여자를 넣어주면 헤벌떡이가 됐다. 그가 어느 날 남국정에게 귀엣말로 속삭였다.

“처녀 다 필요 없다해. 기집은 훔쳐 먹듯 해야 몸에 좋아해. 사대부집 기집년이면 우리 싸람 최고다해. 당신이 힘 있어해. 그런 여자 구해와 해.”

“여부가 있겠습니까. 도독 어른 명이라면 조선 팔도 여자 누군들 못 잡아 오겠습니까. 오늘은 명흥루로 흥청과 엉덩이 실한 년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인조 임금께 이놈 늘 챙겨주시는 말씀만 해주시는 은혜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인조는 모문룡의 말이라면 쓸개라도 내줄 태세였다. 천조의 장수 아닌가. 모문룡은 광해군 시절 후금을 정벌한다며 산둥반도와 강남(江南) 간 밀무역으로 재미를 봤다. 조선의 국방비 3분의 1이 그의 뒷돈을 대는데 들었다.

그런데도 후금과 싸울 생각을 않고 8년 간 공녀(貢女)나 요구하고 있었다. 서인을 중심한 사대 관료들은 모문룡이 오랑캐 나라를 물리쳐 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남국정, 조선 인재 50여명 칼로 죽이고 전면 등장

남국정은 무장이었으나 붕당의 가신 같았다. 그는 인조반정에서 훈련대장 이흥립의 휘하에서 칼을 휘두른 반정 공신이었다. 서인과 인목대비 힘으로 급부상한 그는 시대착오적인 반청친명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공포정치에 앞장섰다. 반정 때 죽거나 유배된 관료 및 유생이 350명에 달했는데 그의 칼에 죽은 사람만 50명이 넘었다.

주로 유생을 살생했는데 그들은 과거급제를 통해 사해정세를 내다 볼 줄 아는 조선의 인재들이었다. 이 인재, 즉 사림들은 “명분에 휩싸인 명 사대는 조선을 망하게 만들 것” 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훗날 병자호란으로 그들의 충언은 진실이 되고 말았다.

‘변경이 심각하다’ 보고 묵살하고 국내정치 개입

남국정이 사해정세를 모르고 명사신과 홍제원에서 여염집 유부녀들 끼고 홍제천 계속에서 난잡한 희롱을 계속하고 있을 때 남인들의 상소가 이어졌다.

‘남국정은 북방의 사태가 심히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국내 정치에 개입에 열을 올리는 가하면 사대에 빠져 홍제원 계곡에서 모문룡 등과 주색에 빠져 있나이다. 더구나 백성은 남국정과 인목대비와의 추문을 사실로 믿고 있으니 이를 명쾌히 짚고 넘어가야 할 일입니다. 민심이 이반하고 있으니 그를 처벌하여야 마땅하나이다.’

그 시각에도 남국정은 인목의 가슴을 풀어헤쳤다. 인목은 감창소리를 내며 남국정의 말 뒷목 같은 두툼한 목을 껴안았다. 사타구니가 후끈하여 불이라도 데기라도 한 듯했다.

남녀의 방사가 끝났다. 가슴가리개 끈을 쥐어 매던 인목이 묘한 미소를 띠며 남국정에게 말했다.

“광해군이 후금과 한 밀약이 있다. 조선이 명을 돕지 않는 대신 후금이 조선을 치지 않겠다는 문서다. 이걸 입수하여라. 그리고 남인들이 너를 공격하거든 비변사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공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거라. 어차피 제거해야 할 남인 잔당들이다. 오랑캐가 아무리 세가 드세 진다한들 중원을 장악하겠느냐? 협박은 분명 먹혀든다. ”

남국정은 인목의 수에 감탄해 무릎을 탁 쳤다. 북슬북슬한 털이 드러난 다리였다.

인목은 그런 남국정의 다리털 사이를 헤집듯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을 넣었다. 그리고 점차 거무튀튀한 남근을 향해 올랐다. 마치 사행(蛇行)처럼 올라가 남근을 감쌌고 남국정은 ‘으으’ 하며 쾌락으로 빠져들었다.

한편 용골대는 정세 파악을 마친 뒤 부하들이 준비한 말을 타고 북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광화문 앞에선 광해군 잔당 세력을 뿌리 뽑으라는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병자호란 직전의 먹구름이 경복궁 하늘을 뒤덮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기자·시사소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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