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甲)질’이 넘쳐난다. 땅콩 한 봉지 때문에 출발한 항공기를 돌리고, 주차 때문에 아르바이트생을 무릎 꿇린다. 대한민국이 아니라 ‘갑질민국’이라는 요즘, 알고 보면 갑질은 브라운관 속에도 있다. “갑질이 따로 없다니까요.” 가요계 ‘갑질’, 어떨까.
넘쳐나는 음악방송, 출연하기가 너무 힘들다
아이돌 그룹 A의 매니저는 매주 수요일이 되면 마음을 졸이며 핸드폰만 부여잡고 산다. 금~일요일까지 방송되는 지상파 3사 음악방송 출연여부가 아직 타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 인기 가수들의 스케줄은 활동 시작도 전에 이미 꽉 차 있는 것이 태반이지만,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의 3일은 꼭 비워놓는다. 지상파 음악방송 출연 여부를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 예를 들면 KBS ‘뮤직뱅크’는 금요일 오후 6시에 방송되지만 가수들은 자신의 출연 여부를 목요일 오전까지도 모를 때가 많다. 인기 그룹은 조기 섭외되지만, 그렇지 못한 가수들은 바로 전날 저녁에 출연을 통보받고 부랴부랴 방송을 준비하는 경우가 많다.
금요일에서 일요일까지의 3일만 비워놓는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다. “다른 방송에 출연하지 않으면 음악방송에 출연시켜 주지 않겠다”는 으름장에 울며 겨자 먹기로 다른 일정을 취소하고 방송 일정에 가기도 한다. 가수의 신뢰도는 하락하지만 어쩔 수 없다.
매니저들은 본인이 맡은 그룹이 컴백하기 2~3주 전부터 방송국 작가실 문턱을 마르고 닳도록 드나든다. 새로 나올 앨범과 선물, 간식거리를 바리바리 싸 들고 방송국을 한바퀴 순회하며 “잘 부탁한다” “곧 컴백한다”는 인사를 수백 번도 더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나간 음악방송 녹화도 만만하지는 않다. 5인조 아이돌 그룹 B의 경우 음악방송이 있는 날이면 오전 4시에 일어나 미용실에서 부랴부랴 메이크업을 받은 후 오전 6시까지 방송국에 도착해 대기한다. 방송국 사전녹화시간을 맞추기 위해서다. 지상파 음악방송들은 모두 오후 늦게 방송을 시작하지만 아이돌 그룹들은 무조건 오전에 출근해 하염없이 대기한다.
“사전녹화시간까지만 도착하면 되지 않냐”고 물으니 B그룹의 매니저는 손사래를 친다. 그러다 늦기라도 하면 “다음주에 출연하고 싶지 않냐”며 경을 친단다. 녹화를 마쳤다고 끝나는 건 아니다. 본 방송시간까지 대기했다가 자신들의 녹화분이 방송될 때 무대에 올라 그때까지 기다려 준 팬들에게 인사를 하고, 방송을 끝낸 제작진에게 공손한 인사까지 마쳐야 그날의 일정이 끝난다. 숙소에 돌아가는 시간은 빨라도 밤 9시다. 강행군이 따로 없다. 일주일 중 하루의 방송을 위해 매니저부터 아이돌까지, 5분 대기조가 돼야 한다.
오빠 얼굴 보기가 너무 힘이 드네요
그렇다면 그 가수들을 좋아하는 팬은 어떨까. 금요일 ‘뮤직뱅크’에 나오는 아이돌 그룹 C의 사전녹화시간이 아침 8시라면 C의 팬들은 아침 7시까지 모여 줄을 선다. 그러나 관람인원은 제한돼 있고, 대부분 선착순 입장이다. 팬들은 얼마나 방송국 앞에 일찍 모일까? 놀랍게도 이들은 전날부터 밤을 새워 줄을 선다. 매주 주말 저녁이면 방송국 근처에서 밤을 새우는 10~20대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초라도 줄을 빨리 서서 조금이라도 더 ‘오빠’를 보고 싶은 욕망 때문에 이런 고생을 자처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끝난다면 ‘갑질’은 아니다.
방송국은 이들의 소위 ‘빠심’을 이용해 방송을 만든다. 음악방송 보겠다고 아침에 모인 팬들은 오후까지 다른 녹화에 방청객으로 동원된다. 아이돌 그룹 C의 팬이라는 김모(23)씨는 이런 방식이 지긋지긋하다고 토로했다. “아침 7시에 C가 사전 녹화를 시작하니 새벽 5시30분까지 모이라고 해서 모였어요. 첫차도 다니지 않는 시각이니 방송국 앞에서 밤을 샜죠. 7시에 시작한다던 녹화는 9시30분까지 지연됐고, 그마저도 다른 가수들이나 전혀 다른 프로그램의 녹화를 몇 개나 저희를 동원해 진행하고 나서야 C를 볼 수 있다더라고요.” 다른 녹화에 동원되다가 중간에 화장실이라도 갈라 치면 경호원들은 “C의 팬들은 예절이 없으니 앞으로 방청을 못하게 하겠다”며 막았다. 결국 이씨는 밤을 샌 채로 다른 녹화를 세 개나 보고서야 겨우 C의 녹화를 볼 수 있었다.
“한 번은 화장실이 너무 급해서 C의 녹화를 못 봐도 좋으니 보내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녹화를 진행하던 스태프가 ‘이런 식으로 녹화에 불편을 주면 C의 방송 활동에도 불이익을 주겠다’고 으름장을 놓더군요. 좋아하는 게 약점인 줄 그 때 처음 알았어요.”
“연말시상식의 경우는 더 심하다”고 김씨는 분통을 터트렸다. 한 지상파 방송국은 2014년 연말 해당 방송사의 가요 시상식 입장권을 내부 직원들에게 상여금 대신 지급했다. 사내 행사 입장권이 어떻게 상여금 대신이 될 수 있냐고 물으니 김씨는 “방송국 직원들이 아이돌 가수 팬들에게 그 티켓을 팔아 연말 상여금을 충당한다”고 말했다. 중고 거래 까페 등에서 연말 가요 시상식 입장 티켓은 50만원에서 90만원까지의 높은 금액으로 거래된다.
“정말로 그 가격에 방송국 입장권을 사는 사람들이 있냐”라고 물으니 김씨는 “그 돈을 주고서라도 보는 팬들이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를 묵인하는 방송국의 태도라고 김씨는 지적했다. 티켓이 중고거래되는 것을 알면서도 방치한다는 것. 그 와중에 악덕 암표업자들까지 가세해 가짜 티켓을 고가에 구입한 팬들도 있다.
가수와 팬 뿐만 아니다. 가요를 만드는 뒤에서는 좀 더 많은 ‘갑질’이 벌어진다. 인기를 기반으로 돈을 버는 일들이니만큼 인기 때문에 벌어지는 갑질은 상상 이상이다.
인기 작곡가 섭외, 난항에 난항… “내 곡은 무조건 타이틀로”
그룹 A는 멤버들의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매번 놀랍기 그지없는(?) 곡을 들고 컴백해 팬들을 힘겹게 한다. 그룹의 인지도를 생각하면 대중성 넘치고 좋은 곡을 골라서 컴백할 만도 한데 매번 타이틀곡이라고 내놓는 노래들이 대중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 볼래야 찾아볼 수 없다. 이유는 뭘까. 바로 작곡가의 ‘갑질’ 때문이다.
최근 음원사이트를 통해 음악을 듣는 문화가 확산되며 인기 작곡가들은 가수들에게 곡을 줄 때 반드시 “내 곡은 타이틀 곡으로 해 달라”고 주문한다. 저작권료 때문이다. 가수들이 활동하는 타이틀곡이냐, 앨범 수록곡이냐에 따라 음원수익은 확연하게 갈린다.
“타이틀곡 할 거 아니면 곡을 안 주겠다”며 곡을 들려주지도 않는 작곡가들 때문에 가수들은 작곡가의 네임 밸류만 믿고 계약을 먼저 한다. 다른 그룹에게 줬던 곡이 좋으니 이번 곡도 히트하겠지, 라는 믿음도 있다. 그러나 막상 받은 곡을 들어보면 타이틀은커녕 수록곡으로 쓰기도 힘든 퀄리티의 곡들이 내려오는 일이 흔하다. 곡에 지불한 돈도 아까울 노릇이지만 타이틀로 쓰겠다고 약속을 해놨으니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이다. 그래도 결국 자체 제작팀의 편곡 등을 거쳐 그 곡을 타이틀로 쓴다. 혹시나 ‘대박’을 기대하는 마음도 마음이지만 인기 작곡가들과의 인연 유지를 위함이다. 이번만 활동하고 끝낼 것은 아니기에.
“막내 매니저 구하기가 너무 힘들어” 왜일 것 같습니까, 이 양반들아
신입 매니저 구하기가 ‘미션 임파서블’이란다. 최근 연예 기획사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다. 소속 연예인들의 일정은 많은데 그를 따라다닐 매니저들의 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속을 뜯어보면 신입 구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너무 당연하다. 활동 중인 인기 그룹의 매니저 B의 하루를 살펴보면 답은 나온다.
B의 근무 시간은 하루 24시간 중 18시간 정도다. 가수가 오전 5시에 일어난다면 매니저는 4시에는 일어나 일정을 바지런히 챙겨야 한다. 가수들은 차 안에서 눈이라도 붙이지만 매니저들은 운전을 해서 가수들을 무사히 모셔야 한다. 인기 가수라면 경호도 겸해야 하고, 심부름도 해야 한다. 주말은 당연히 없다. 365일, 24시간 주말 없이 들쑥날쑥하게 일한다. 눈을 붙일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5시간 남짓. 그러나 받는 돈은 한 달에 고작 80만원 정도다. 그나마 큰 기획사들은 100만원 초반부터 시작한다.
그런 매니저들의 고용 조건은 어떻게 될까. 현재 구인구직 사이트에 떠 있는 한 기획사의 채용요건을 살펴봤다. 일본어, 중국어, 영어 등 외국어 능통자 / 4년제 대졸 / 1종 운전면허 보유자가 기본 요건이다. 한글 맞춤법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외국어 능통자를 하루 18시간 굴리면서 한 달에 100만원이라니, 구하기 힘든 것이 당연해 보인다.
을 중의 을, 연습생… 연예인 지망생들의 악착같은 분투기
매니저, 가수, 팬들이 저마다 아웅다웅, ‘을’임을 논하지만 을 중의 을은 따로 있다. 바로 기획사 연습생들이다. 가수 지망생들을 통틀어 말하는 ‘연습생’들은 대부분의 가요 기획사들에 존재한다. 10대 초반에서 후반까지 다양한 나이대의 이들은 자의로 기획사에 몸담게 되지만, 자의로 나가지는 못한다.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교도 가지 않고 연습에 매진한다.
유명 기획사 연습생 출신 배우 C씨(23)는 “연예인이 되고 싶은 마음을 누를 만큼 연습생 생활은 갑질의 연속이었다”고 털어놨다. 연습생들의 생활은 연습만으로 점철돼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C씨를 비롯한 연습생들은 기획사 직원들보다 더 빠른 시간인 아침 8시에 출근해 연습실을 포함한 건물 청소를 도왔다. 지각이라도 하면 지각비를 내야 했다. 직원들 심부름은 예삿일이었다.
연습에 빠지거나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신인개발팀에게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났다. 맞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언제 가수 될 거냐”라는 윽박지름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학교를 자퇴하고 기획사 연습실에 나오는 친구들도 많았다. C씨는 중도에 고등학교를 자퇴했다가 연습생 생활을 그만둔 후 검정고시를 봤다. 그만두는 과정도 순탄치는 않았다. C씨가 기획사를 나오려 하자, 회사에서는 “그동안 네게 들어간 비용은 어떻게 할 거냐”며 연습생 비용을 요구했다. 결국 C씨는 부모님께 손을 벌려 430여만원을 몸담고 있던 기획사에 내고 자유의 몸이 됐다.
데뷔한 친구들이라고 연습생 비용에서 자유롭지는 않다는 것이 C씨의 설명이다. C씨와 함께 연습하다 데뷔한 그룹 D의 멤버들은 데뷔한 지 1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제대로 된 수익 정산을 받지 못했다. 기획사가 멤버들의 연습생 기간별로 연습비를 물렸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연습기간이 긴 한 멤버는 연습비를 반도 갚지 못해 개인 활동에 매달린다.
그나마 돈만 물리면 다행이다. 일례로 2011년 오픈월드엔터테인먼트의 장석우 대표가 소속사 연예인 지망생들을 상습 성폭행한 혐의로 구속됐다. C씨는 “기획사의 투자자들에게 성상납을 하라며 내몰리는 예도 있다”며 “데뷔만 바라보는 연습생들은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거부하면 그동안의 연습비용을 물리는 것은 물론 기획사에서 쫓겨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조현우 기자 can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