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 대중문화는 우리와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영화산업 하나만 떼놓고 봐도 1년 극장 관람객 입장권 매출액은 1조 5000억원(2013년 기준)에 달하죠. 현재 한국에 사업자로 정식 등록돼있는 영화 제작사는 약 2000여개. 그만큼 규모가 큰 산업이며, 종사자도 엄청납니다. 배우들은 영화 한 회에 억 단위 개런티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외의 대중문화 종사자들은 적절한 대우를 받고 있을까요? 언뜻 화려해 보이지만 그 멋진 광경 뒤에는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합니다.
신조어 중 ‘열정페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오로지 열정을 위해서라면 적은 돈도 개의치 않는 젊은 창작자들을 이용해, 반대로 ‘열정’을 핑계로 정당한 임금 지급을 받지 못하는 경우를 뜻합니다. 대중문화산업계에서 ‘열정페이’ 사례를 찾기는 너무나 쉽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예술인복지법 개선을 위해 나섰지만 현업 종사자들은 “제대로 대우 받으려면 멀었다”고 고개를 내젓습니다. 정당한 임금을 지급시키려 만든 제도와 ‘열정페이’뿐인 실무 간의 간극이 엄청나다는 겁니다. 뭐가 문제일까요. 산업 현장? 종사자들의 인식? 교육 환경? ‘열정페이 같은 소리’는 모두가 즐거워할만한 콘텐츠를 만들면서 정작 즐겁지 않은 대중문화 종사자들을 인터뷰하고 문제점을 알아봅니다. 현업 종사자들이 원할 경우 인터뷰는 비실명 처리됩니다.
(③에서 계속)영화제작자협회와 영화산업노조가 합의해 2015년부터 업계에 표준계약서가 정식으로 도입됐다. 표준계약서는 경력에 따라 영화 스태프들의 시간별 임금을 계산·지급하는 방식이다. 일부 제작자들은 표준계약서 도입으로 영화 제작비가 평균 5억 원 이상 늘었다고 볼멘소리를 하지만 해당 비용은 본래 지출했어야 할 비용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그러나 표준계약서가 아직 업계에서 기본이 되기는 멀었다. 2015년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국제시장’(감독 윤제균)이 막내 스태프까지 표준계약서를 작성시킨 사실이 화제가 된 사실만 봐도 명백하다. 미담이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스태프들이 표준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이 뉴스에 보도될 정도로 업계에서는 희귀한 일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 몸값 스스로 낮추는 이들… “저 좀 써 주세요”의 딜레마
전문가들이 표준계약서 미작성, 4대보험 미가입, 낮은 인식 외에도 ‘열정페이’의 원인으로 꼽는 것은 젊은 신인들의 ‘몸값 낮추기’다. 배우, 촬영, 조명, 프로듀서, 분장, 의상…. 어떤 분야건 할 것 없이 처음 일을 맡게 되는 신입들은 끊임없이 있다. 그러나 업계 구조상 신입들의 시장 진입은 대부분 인맥에 의존하는 것이 태반이다. 이들은 업계 진입 불발을 두려워해 ‘아는 사람’이 낮은 임금을 제시한다 해도 ‘일단 하고 보자’는 식으로 일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더러는 이력을 채워 경력이 생기면 나중에라도 높은 임금을 받겠다는 심산으로 임금을 낮춘다.
인맥에 의존하지 못하는 이들은 더더욱 이런 상황이 심화된다. 미지의 고용주들은 항상 구인공고의 임금 란을 ‘추후협의’ 혹은 ‘면접시 협의’등으로 채워 넣는다. 정확한 임금을 제시하는 업체는 찾아보기 어렵다. 신입이 받아야 할 제대로 된 임금수준을 알지 못하고 시장에 진입하는 것이다. 자연스레 고용주들이 제시한 임금이 업계 표준인지, 혹은 ‘열정페이’인지 분간하지 못하고 일을 하게 되고, 나중에는 자신이 받는 임금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한다. 다른 업종에 비하면 분명 낮은 임금이지만, 그것을 업계 표준이라고 알게 되는 것이다.
결국 장기적으로는 ‘제 살 깎아먹기’가 된다. 낮은 임금에도 불구하고 일을 하는 신입들이 늘면, 고용주들은 다른 신입들도 낮은 임금으로 쓰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이력을 채우기 위해 적은 임금을 감당하는 신입들이 점점 늘어나고, 결국 낮은 임금이 ‘진짜 업계 표준’이 돼 버린다. 문제는 이력을 채운 후 경력자가 돼서 임금을 바꾸겠다는 결심으로 저임금을 감당하던 신입들이, 정작 생활 유지가 되지 않아 이직해버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업계에 남는 것은 낮아져버린 표준임금뿐이다.
■ “독립이라서, 학생이라서”… ‘그래도 된다’는 인식과 정책 근본부터 수정해야
배우 K씨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독립이라서’와 ‘학생이라서’다. 인지도가 낮은 배우들은 필연적으로 구인 사이트 등을 통해 다양성 영화(독립영화)와 학생 제작 영화 등의 오디션에 지원한다. 오디션을 통과해 영화의 주·조연으로 낙점된 다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이야기는 임금이다. 그러나 “페이(Pay·임금)가 어떻게 되냐”라는 K씨의 물음에 대부분 돌아오는 것은 “얼마를 원하세요?”라는 질문이다. 임금이 ‘제시가’가 아니라는 것은 상식인데도 그렇다.
그리고 뒤잇는 말은 어김없이 “독립이라서” 혹은 “학생이라서” 적게 드리겠다는 말이다. 적절한 임금 수준을 맞추지 못하면 독립 영화던 학생 영화던 제작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독립영화 감독과 학생 감독들은 자신들의 열악한 재정 상태를 핑계로 저임금을 타인에게도 강요하고 있다. 독립영화, 학생 영화라고 해도 상업영화와 작업 강도가 다르지는 않다. 오히려 상황이 열악한 만큼 노동 강도가 더 높은 경우도 많다.
그들이 자라 상업 감독이, 혹은 제작자가 되면 달라질까. 자신이 이 구조의 기득권이 됐을 때 저임금 고노동 구조를 바꾸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까. 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기득권층의 높은 곳에 있을수록 이런 구조는 점점 득이 될 뿐이다. 그렇게 ‘열정페이’는 점점 늘어나고, 열정은 사라진다.
영화노조 등 이익단체가 늘어나 활성화됐음에도 좀처럼 업계 관행이 개선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익단체가 아무리 노동자들의 임금권을 주장한다고 해도 업계 기득권자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구조를 유지할수록, ‘열정페이’가 유지될수록 그들이 얻는 이득은 점점 커지고 달콤해진다.
영화계의 사례만 들여다봤는데도 이토록 복잡다단하다. 시간당 임금, 연차의 인정, 표준계약서 도입과 4대 보험, 교육현장 인식 개선…. 비슷한 대중문화계지만 방송계나 가요계는 또 다른 사례들이 기다리고 있다. 속 시원한 사례는 아니다.(⑤에 계속)
이은지 기자 onbge@kukinews.com(사진=국민일보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