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이나 악화 속도가 빠른 혈액암은 처음 진단받은 시기, 또 첫 재발 시점에서 적정 치료를 받는 게 매우 중요한데, 국내에선 신약이 도입되고 급여가 적용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려 혈액암 환자의 예후가 좋지 않다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적극적으로 혈액암 치료제 급여 적용에 나서야 한다고 피력했다.
임호영 전북대학교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15일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제65차 대한혈액학회 추계학술대회’ 정책토론회 세션에서 “다발골수종 등 혈액암은 종양이 이질적이고, 진행이 빨라 초기 치료와 재발 시 조기 치료가 중요하다”며 “최근 혁신적인 신약들이 등장하며 치료 성적이 개선된 연구 결과가 잇따르고 있지만, 정작 환자들의 약에 대한 접근성은 떨어져 치료가 미진한 상태”라고 밝혔다.
임 교수는 CD38 계열 다발골수종 신약 급여 현황을 예로 들었다. 최근 다발골수종에서 주목받고 있는 신약은 다라투무맙(제품명 다잘렉스), 이사툭시맙(제품명 살클리사)이다. 다라투무맙은 2017년 11월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를 받았고, 2년 뒤 최소 3가지 약제에 불응인 환자를 대상으로 급여가 적용됐다. 즉 적어도 3번의 치료 실패가 있어야 다라투무맙 단독 치료가 가능하다는 의미다. 다라타무맙은 비급여로 사용할 경우 1년에 8300만원이 든다.
임 교수는 “다라투무맙은 6개월 단독 투여했을 때 약 30%의 환자에서 5개월의 생존 연장이 확인됐다”며 “다른 약제와 병용요법으로 쓴다면 90개월까지 생존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국내에선 2019년 4차 치료 단독요법으로 급여를 적용한 이후 5년이 넘도록 급여 확대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경쟁 약물인 이사툭시맙은 국내 약가가 낮다는 이유로 한국 출시를 포기했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이중항체, 키메라항원수용체(CAR-T) 등 고가의 신약도 해외에선 활발히 사용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선 급여가 적용되기까지 굉장히 많은 시간이 걸린다”면서 “결국 환자 선택권은 줄어들고 글로벌과 비교해 국내 혈액암 환자들의 생존율이 낮은 상황이다”라고 짚었다.
임 교수는 혈액암 치료제 급여화를 위한 협의와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임 교수는 “혈액암은 병용요법이 필수적이며 적절한 시점에 사용돼야 효과가 있다”며 “정부는 뒤처진 국내 혈액암 치료를 보완하기 위해 혈액암 전문가들과 논의해 적극적으로 약가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혜리 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비급여 사용마저 막혀있는 약제에 대한 접근성 보장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김 교수는 “비세포성 급성 백혈병은 블린사이토라는 약을 쓰는데, 병이 재발한 약 20명 정도의 환자만 이 약을 사용한다”며 “소아에서 재발한 비세포성 백혈병에 블린사이토를 쓰면 훨씬 생존율이 증가한다는 무작위 3상 임상 결과가 이미 2개나 나왔지만 급여도 되지 않고, 비보험으로 쓰겠다고 해도 암질환심의위원회에서 부결됐다”고 했다.
김 교수는 “블린사이토는 1년간 투약 받는 데 약 1억 원 정도의 비용이 들어가지만 부모들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 약을 쓰려고 한다”며 “소아암, 소아중증희귀질환에 있어 임상 데이터가 명확하다면 급여를 적극 검토하고, 적어도 이를 사용할 수 있는 창구라도 마련해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보건복지부는 향후 탄력적인 경제성 평가를 통해 보장성을 넓히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박희연 복지부 보험약제과 사무관은 “의약품의 허가부터 급여 등재까지 소요기간을 6개월로 줄이는 신속등재 시범사업을 운영하고 있다”며 “이 과정을 통해 환자는 허가와 동시에 임시 약가를 받아 비급여보다 저렴하게, 또 빠르게 약을 쓸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 사무관은 “선택 옵션이 적은 항암제, 신약 등은 의약품 경제성 평가 시 약제의 점증적-비용효과성 임계값(ICER)보다 탄력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방향을 검토하겠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