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소연 기자 =노동자 사망사고가 발생할 경우 기업과 경영책임자를 강하게 처벌하는 ‘중대재해 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은 10일 오후 3시 서울 여의도에서 ‘중대재해 기업처벌법 우선 입법 촉구 결의대회’를 열었다. 민주노총 조합원과 산재피해가족네트워크 ‘다시는’ 등 3000명이 모여 “죽지 않고 일할 권리 투쟁으로 쟁취하자” “위험의 외주화 금지하고 중대재해 기업처벌법 제정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여의도공원 11번 출입구부터 마포대교 사거리까지 3차선 도로가 집회 참가자들로 채워졌다. 주최 측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우려와 관련 마스크 착용과 참가자 간 간격 유지를 당부했다.
민주노총은 이날 투쟁 결의문에서 “한익스프레스 이천 산재참사로 건설노동자와 이주노동자 38명이 떼죽음을 당한 지 40일이 되어가지만 진상규명도 책임자 처벌도 진행된 것이 없다”며 “지난 2008년 노동자 40명 산재사망에 2000만원 벌금이라는 솜방망이 처벌이 결국 2020년 참사를 불러왔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제정됐다면 38명의 떼죽음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지난 2008년 경기 이천의 냉동 물류창고에서 화재가 발생해 노동자 40명이 숨졌다. 현장 점검 없이 소방 안전점검 필증 발부, 조급한 공사 강행 등이 논란이 됐다. 기업 관계자들은 2000만원의 벌금 또는 집행유예 판결을 받는 것에 그쳤다. 지난 4월 비슷한 사건이 다시 발생했다. 이천 한익스프레스 물류센터 신축공사 현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38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 공사 현장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개선을 요구했지만 업체 측에서 이를 따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노총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노동자와 시민의 죽음이 계속돼야 중대재해 기업처벌법을 제정할 것이냐”면서 “생명안전과 일하는 국회를 내세우면서 입법에 나서지 않는 정부·여당과 21대 국회를 규탄한다. 중대재해 기업처벌법의 즉각적인 제정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이야기했다.
지난해 4월 경기 수원의 한 건설 현장에서 산업재해로 사망한 건설 노동자 유가족의 호소도 나왔다. 고(故) 김태규씨의 누나 김도연씨는 “24살밖에 살지 못한 태규는 불법 운행 엘리베이터에서 안전장비 없이 일하다 추락사했다”며 “지난달 현장 책임자 등의 재판에서 검찰의 구형은 양형기준에 비해 턱없이 낮았다. 벌금 1000만원과 징역 10월형 등에 그쳤다. 결국 선고에서는 집행유예 정도의 면죄부밖에 주지 않을 것”이라고 울먹였다.
사업주의 안전조치 의무를 규정화한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이 있지만 처벌은 ‘솜방망이’에 그친다. 이른바 ‘김용균법’으로 불리는 산안법에 따르면 안전·보건 조치를 미이행해 노동자의 사망사고 등을 야기할 경우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형이 확정된 후 5년 이내 동일 범죄를 저지를 경우 그 형의 2분의 1까지 가중할 수 있는 누범 규정이 신설됐다. 그러나 양형기준이 일반 업무상과실치사죄보다 낮아 여전히 재판에서 가벼운 사건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용득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대법원으로부터 받은 ‘2009년 이후 현재까지 산안법 위반 판결 현황 자료’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산안법 위반으로 모두 6144건의 1심 재판이 이뤄졌지만, 이 중 0.57%인 35건만 금고·징역형이 선고된 것으로 나타났다. 산안법 위반 피고인 중 80.73%는 집행유예 또는 벌금형을 받는 것에 그쳤다.
지난 2018년 고용노동부가 발행한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사건 판결 분석 연구’에서도 “벌금형이 선고되는 피고인의 수는 지난 2013년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했다”며 “5년간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사범 중 집행유예와 벌금형을 받은 인원은 90.72%”라고 지적됐다.
이로 인해 산안법의 구멍을 중대재해 기업처벌법으로 막아야 한다는 지적이 인다. 해당 법안은 지난 2017년 고(故)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발의했으나 논의되지 못하고 폐기됐다. 당시 사망사고 등 중대재해가 발생할 경우, 노동자와 하급관리자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기업 법인과 최고책임자를 처벌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사업주 및 경영자에 대해 법정 최저형을 3년형, 벌금 상한을 5억원까지 높인 내용이 담겼다.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은 중대재해 기업처벌법 제정으로 기업의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권미정 김용균재단 사무처장은 “국회의원들도 비슷한 사고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문제 의식을 갖고 있다”며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때 법인과 기업 경영주, 관리감독 의무가 있는 공공기관에 대한 책임을 정확히 물어야 한다. 현재 산안법으로는 이를 포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중대재해 기업처벌법 제정 운동본부 소속 김혜진 활동가는 “산업재해로 인해 매년 2400명 정도가 목숨을 잃는다. 가습기살균제와 불산누출 등 기업에 의해 시민들이 재해를 입는 경우도 있다”며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니 예방이 되지 않는다. 처벌을 강화하고 실질적인 책임자들이 책임을 지게 해야 재해의 고리도 끊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21대 국회에서도 움직임이 일고 있다. 10일 중대재해 기업처벌법 제정 운동본부에 따르면 국회의원 36명이 해당 법안 제정에 찬성했다. 더불어민주당 26명, 정의당 6명, 열린민주당 3명, 기본소득당 1명이다.
전문가는 법안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공감하면서 신중한 법 제정을 강조했다. 이진국 아주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재해에 대한 기업의 책임을 강화하는 법은 필요하다”면서 “영국식의 기업과실치사법과 양벌규정 등 어떠한 방식으로 도입할지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 현행 법체계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제도”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인 법안이 될지 검토하고 고민하는 것이 국회와 전문가의 역할”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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