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읽기] '베리드 스타즈', 악의는 익명에서 피어오른다

[게임읽기] '베리드 스타즈', 악의는 익명에서 피어오른다

기사승인 2020-09-10 05:30:03
'베리드 스타즈'. 사진=라인게임즈 제공


[쿠키뉴스] 강한결 기자 = '리플(댓글)'은 인터넷 문화를 대표하는 요소입니다. 사이버 공간을 통해 익명의 불특정 다수가 서로 각종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인터넷 게시판이 활성화되면서 생겨난 문화죠. 

사이버 공간에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마음껏 펼 수 있는 공론의 장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댓글문화는 디지털 민주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면서 시민들은 새로운 정보 주체로 부상했습니다. 산업화 시대까지만 해도 소수의 상위계층이 사회‧문화적 헤게모니를 향유했지만, 정보화 시대가 도래한 이후에는 대중들이 이를 주도하게 됐죠.   

하지만 명이 있다면 암도 있는 법일까요. 익명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타인을 비방하고 악의적인 루머를 퍼뜨리는 이들도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타인을 악의적으로 비하할 목적으로 남기는 악성 댓글, '악플(악성 리플)'이 탄생한 것이죠. 

지난달 27일 네이버가 스포츠 뉴스 댓글 서비스를 잠정 중단했습니다. 카카오와 네이트는 앞서 지난달 7일부터 스포츠 뉴스 댓글 달기를 금지했죠. 악성 댓글로 인해 선수들의 고통이 심각하다는 지적에 내린 결단이었습니다. 스포츠뿐만이 아닙니다. 지난 7월부로 주요 포털사이트는 연예뉴스의 댓글 서비스를 운영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유는 스포츠 뉴스 댓글 서비스 중단과 동일합니다.

불행히도 악플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됐습니다. 직종을 막론하고 개인의 신상이 공개된 이들은 모두 '사이버 불링'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시대입니다. 영화나 드라마 등의 대중문화에서 악플을 주제로 다루는 것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영화 '소셜포비아' 공식 포스터.


2015년 개봉한 홍석재 감독의 '소셜 포비아'는 SNS 상의 악플과 온라인 상에서 벌어지는 마녀사냥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영화인데요. 이 작품은 제 1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과 넷팩상을 수상했고, 제 40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도 관객상을 받았습니다. 저예산 독립영화임에도 22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으니 작품성과 흥행성을 모두 잡은 셈이죠.

최근에는 악플을 핵심소재로 다룬 게임도 발매됐는데요. 지난 7월 라인게임즈는 '검은방', '회색도시' 등의 어드벤처 장르의 게임을 선보였던 '수일배' 진승호 디렉터의 신작 콘솔게임 '베리드 스타즈'를 선보였습니다. 이 게임은 서바이벌 오디션 도중 발생한 의문의 붕괴 사고로 고립된 캐릭터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군상극을 다룬 작품입니다.

'베리드 스타즈'에는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합친 가상의 SNS '페이터'가 등장합니다. 페이터는 등장 인물들에게 바깥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무서운 공간이기도 하죠.

페이터에서 익명의 불특정 다수는 주인공 일행에게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퍼붓죠. 거짓과 진실이 교묘히 섞인 허위사실도 난무합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자세한 부분은 설명하기 힘들지만, 페이터로 인한 끔찍한 파국도 일어나게 됩니다.

'베리드 스타즈'에는 생사의 위기에 몰린 주인공에게 자살을 종용하는 악플러들이 나온다.


게임을 제작한 진 디렉터는 '베리드 스타즈'에서 등장하는 페이터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과거 제가 트위터를 열심히 쓰던 때인데, 퇴사 소식이 기사화되면서 기자, 게이머 등 팔로우하고 있던 많은 분들이 일제히 그 이야기를 하는 경험을 했다"고 설명했죠. 이어 " 나 자신이 이런 타임라인 안에서 화젯거리가 된다는 게 충격적이고, 정신적으로 힘든 부분도 있었다"고 털어놨습니다.

'베리드 스타즈'에 등장하는 상황이 참혹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게임 속에서 발생하는 상황이 너무나도 현실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익명 속에 숨은 일부 누리꾼들은 인물들의 죽음을 바라며 저주를 퍼붓습니다. 또한 페이터에서는 30%의 팩트와 70%의 허위사실이 교묘히 섞인 가짜뉴스가 판을 칩니다. 팩트가 살짝 가미된 거짓이 얼마나 파급력이 큰 지도 잘 드러나죠.

지난해 하반기 연예계에는 두 명의 연예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절친한 친구로 유명했던 설리와 구하라가 한달 간격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해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는데요. 이들이 사망 전 극심한 악플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우리를 숙연해지게 만듭니다.

여러차례 벌어진 비극 이후 주요 포털사이트의 연예‧스포츠뉴스 댓글 서비스가 잠정 중단됐지만 악플러들은 사각지대를 노려 공격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최근 스포츠 선수들의 개인 SNS 메시지를 통해 악플을 보내는 사례가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어 문제가 커진 상황입니다. 

지난달에는 T1 소속 '리그 오브 레전드(LoL)' 프로게이머 '페이커' 이상혁의 개인방송에서 도를 넘는 발언이 나와 눈살을 찌푸리게 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한 악성 시청자는 이상혁의 가족을 들먹이며 악의적인 발언을 했습니다. 이상혁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 대단한 것으로 이미 알려져 있는데요. 선수 본인을 넘어 가족을 향한 인신공격에 T1은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단호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죠.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만, 이제는 '무심코 쓴 악플이 무고한 사람을 죽인다'고 바꿔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공격당한 당사자도, 악플을 남긴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 하나 없는데 왜 이런 비이성적인 행위가 이어지는 걸까요. 

세계적인 교육학자 루돌프 드라이커스는 연구를 통해 "자존감이 낮은 개인은 상처받기 쉬운 자신을 위해 타인을 비방함으로써 자신을 높이는 행동을 한다"고 밝혔습니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사는 연예인, 운동선수가 이들의 먹잇감이 되는 것인데, 자신보다 우월한 상대를 깎아내리며 더욱 보상심리를 얻게 되는 셈이죠. 

심리·과학 저널리스트 톰 벤데필트는 익명성이라는 부문에 집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트래픽'을 통해 운전대를 잡으면 평범한 사람도 과격해지는 이유에 대해 "운전을 할 때에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둘러 쌓여 있으나, 이들은 자동차 외벽과 창문으로 보호받고 있기 때문에 분노를 표출하기 쉽다"고 설명했죠. 악플에 적용해보면 일부 누리꾼들은 선팅이 잘된 차와 같은 인터넷 공간에서 공격성을 드러낸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악의는 익명에서 피어오른다.' 

'베리드 스타즈'를 보며 떠오른 생각입니다. 인터넷 사회에서 우리는 익명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명심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완벽한 익명은 없다는 점이죠. 아이러니하게 익명 속에서 사는 우리는 오프라인 사회에서 보다 더욱 많은 개인정보를 노출하고 있죠. 가면에 숨어 저지른 죄악은 나중에 탄로나기 십상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누구나 악플을 달 수 있는 것처럼, 누구나 악플로 인한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베리드 스타즈'에서 보여지는 작태를 단순한 게임이라고 치부하기 힘든 게 이러한 이유가 아닐까하는 씁쓸한 생각이 듭니다. 

sh04khk@kukinews.com
강한결 기자
sh04khk@kukinews.com
강한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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