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면 선운리에 있는 미당의 고향마을은 남쪽에는 주진천이 서해로 흘러들며 길을 막고 있고 동쪽에는 험준한 소요산이 병풍처럼 서 있다. 북쪽엔 곰소만이 깊이 들어와 있으니 그의 고향마을은 강과 바다와 산으로 가두어진 곳이었다. 그나마 소요산의 북동쪽 끝자락에 겨우 틈이 벌어져 사람들은 이 고개를 통해 그 너머의 부안을 다녔다. 이고 지고 때론 달구지에 싣고 땀을 흘리며 고갯길을 넘어 다녔다. 남의 힘 빌리지 않고 아무 때나 외지에 나갈 수 있었던 고향의 이 고개, 질마재를 미당은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았다.
1915년에 태어난 미당은 2000년 10월 63년을 함께 산 부인이 세상을 뜨자 곡기를 끊고 그해 12월 하늘로 돌아갔다. 2001년 1월 12일 김대중 대통령은 그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미당은 10대의 습작 시기부터 포함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70년간 삶의 시기별로 생로병사에 따르는 온갖 감정이 실린 1,000여 편의 시를 남겼다.
미당이 세상을 뜨고 10년이 지나가던 2011년 11월 미당시문학관 (고창군 부안면 질마재로 2-8)이 문을 열었다. 봉암초등학교 선운분교를 개보수해 꾸민 미당 서정주를 위한 기념공간이다. 이 시문학관 뒤의 마을에 그의 생가가 있고 마주 보이는 건너편 마을 뒤 언덕에 그의 묘지가 있다. 미당의 아우인 서정태 선생과 후손들이 4,000여 점의 유품을 이 기념관에 기증해, 그의 시 세계와 일생을 살필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미당시문학관은 미당의 일생을 소개하고 그가 남긴 시를 읽을 수 있는 공간이다. 한때는 아이들의 재재거림으로 가득했을 복도를 걸으며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가고 그의 시를 한 수, 두 수 천천히 읽다 보면 ‘아! 그래. 맞아. 그랬지.’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머리를 스친다. 계단을 올라 그의 유품들을 보고 그리고 또 올라 그의 아픈 과거, 친일의 글들을 읽으며 꽉 막힌 가슴을 한 층 더 올라 옥상 전망대에서 풀어낸다.
멀리 보면 곰소만 너머 변산반도의 험준한 산봉우리들이 왼쪽으로 바다에 잠긴다. 그 봉우리 사이 계곡에 전나무길이 일품인 내소사가 앉아 있다. 가까이 보이는 마을은 볕이 따듯하게 보이는데 집마다 울타리와 지붕에 갖가지 그림들이 그려져 있고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이야기 벽화 골목이 있는 안현마을이다. 그림보다 이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더 따뜻하다. 이 마을 뒤 오른쪽 동산 끄트머리쯤 미당 부부가 잠들어 있다. 뒤로 돌아보면 매우 험하게 보이는 소요산이 버티고 있다. 이 산 왼쪽 가장자리에 부안으로 통하는 질마재가 있다. 미당시문학관 뒤쪽 마을 오른쪽에 미당 생가가 있다.
다시 계단을 내려와 미당의 시를 몇 수 더 읽는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를 내어 시를 읽다가 문득 ‘어떻게 이런 글이 떠올랐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미당은 우리 말에 관한 한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이 땅에 왔었다. 문학평론가 유종호의 글 그대로 ‘아무 말이나 붙들고 놀리면 그대로 시가 되는 경지에 이른 미당은 정히 부족방언의 요술사다.’
그러나 무조건 미당을 감탄만 할 수는 없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미당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하고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미당은 일제강점기 말 친일 시를 쓰기도 했고,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신군부정권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나에게 친일 문인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분명히 그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1943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최재서가 경영하던 ‘인문사’에서 일본어 잡지 ‘국민문학’ 편집일을 하는 동안 당시 총독부 산하에 소속된 조선국민 총력연맹지부의 요구대로 작품을 쓴 일이 있다. 쓰라는 대로 쓸 수밖에 없었고 모든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해방이 그토록 빨리 오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젊은 그 시절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그 시절이 새삼 아픔으로 다가온다. 친일문제는 분명히 잘못된 일이며 깨끗하게 청산되어야 마땅하다. 당시 나의 정신의 실상을 세상을 뜨기 전에 꼭 글로 남기겠다.”
시인 김춘수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미당의 시로 그의 처신을 덮어버릴 수는 없다. 미당의 처신으로 그의 시를 폄하할 수도 없다. 처신은 처신이고 시는 시다.’
오근식은 1958년에 태어났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대학에 진학했다.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2019년 7월부터 1년 동안 제주여행을 하며 아내와 함께 800km를 걷고 돌아왔다. 9월부터 고창군과 공무원연금공단에서 마련한 은퇴자공동체마을에 입주해 3달 일정으로 고창을 여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