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열여섯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간 태광그룹의 창업주 일주 이임용이 마주한 현실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험난한 일상뿐이었다. 그럼에도 청년 이임용의 마음에는 산업으로 조국을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산업보국의 꿈'이 꿈틀거렸다.
"변변한 공장 하나 없는 나라에서 사업을 하려면 무엇보다 제조업을 해야 한다. (중략) 국가의 재화를 늘리면 그것이 곧 애국이다."
일본의 진주만 습격으로 일본 국내 정세가 불안했던 1942년 이임용 창업주는 귀국길에 오른다. 이후 공무원으로 재직하며 산업 진출을 모색하던 중 아내 이선애 씨와 혼인한다. 그의 나이 23세 때 일이다. 이선애 씨는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와 이기화 전 태광그룹 회장의 누나다.
이 창업주가 산업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아내 이선애 씨의 역할의 컸다. 이선애 씨는 미곡상과 인견가게를 운영하며 돈을 모았고 이 돈은 후일 이 창업주가 사업에 뛰어들 수 있는 밑천이 됐다.
1954년 7월 1일 이 창업주는 부산 문현동에 태광산업사를 설립한다. 지금의 태광그룹의 모체다. 태광이라는 사명도 아내 이선애 씨가 지었다. 태광(泰光)이란 뜻은 커다란 빛으로 태양과 우주의 중심을 뜻한다.
"회사 규모도 규모지만 주식회사가 되면 공신력도 그만큼 커지네"
창업 초기 태광은 이 창업주와 아내 이선애씨와 함께 일궈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이선애씨는 제직공장을 부산은 물론 전국에서 손꼽히는 섬유회사로 키워냈다.
이 창업주는 이를 기반 삼아 태광산업사를 주식회사로 전환 후 모직물 뿐만아니라 방적, 아크릴 등 화섬으로까지 영역을 넓힐 구상을 한다. 1961년 9월 15일 이 창업주는 태광산업사를 자본금 1억환의 주식회사로 출범시킨다. 이후 태광은 섬유를 기반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어간다.
태광 성장에 날개를 달아 준 것은 박정희 정부가 추진한 경제개발5개년계획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 개발과 수출을 국가 최우선 정책으로 내세웠고 아크릴을 생산하던 태광은 경쟁업체도 적어 말 그대로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이어갔다. 아크릴은 양모 못지않게 질기고,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 섬유다. 양모 대체품으로 수요가 많았다.
"은행에 비싼 이자 줘가며 공장을 세워야 할 이유가 없소. 제대로 사업할 생각이 없다면 손을 떼면 될 일 아니오."
이 창업주는 동양합섬을 인수하며 아크릴 사업의 판을 넓혀 갔고 이후 고려상호신용금고, 흥국생명, 대한화섬 등을 차례로 인수하며 몸집을 불려 나갔다. 제조산업과 금융산업을 품에 안은 태광은 그룹의 면모를 갖추며 도약기를 맞았다.
"은행돈은 일요일에도 이자가 붙는다네. 그래서 늘 쫓기게 되지. 사업도 분수에 맞게 해야 하네."
이 창업주는 무차입 경영을 추구했다. 제 분수를 잊고 남의 돈을 가져와 사업을 키우면 실없는 사람이 되고 그런 회사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이 창업주 식 '분수경영'이었다. 그래서 태광은 은행돈을 거의 쓰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창업주의 '분수경영'으로 태광그룹은 70년대 국내 경제를 강타한 1차 오일쇼크 때 별다른 타격없이 오히려 공장 증설에 나설 수 있었고, 2차 오일쇼크 때는 사옥을 매입하는 등 대규모 투자를 단행할 수 있었다.
이 창업주는 번 만큼 투자한다는 기조를 유지하며 문어발식 확장도 하지 않았다. 절약과 남의 돈을 빌려쓰지 않고 수익만큼 투자하는 실속경영은 태광을 더욱 탄탄하게 만들었다.
이 창업주에게 정치는 짐이었다. 당시 야당의 거목인 처남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를 두고 있었던 탓이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부터 전두환 정권까지 군사정권으로부터 강도 높은 세무사찰을 받아야 했다. 강도 높은 세무사찰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세무조사는 태광의 체질을 강화시켜줬다.
1996년은 태광그룹이 창사 이래 최고 전성기를 누릴때 였다. 사업규모다 커졌음에도 이 창업주는 한 달에 두 번은 전국사업장을 돌았다. 사업장 순회를 할 때는 1박2일이나 2박3일이 걸렸지만 이 창업주는 단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다.
"업무를 하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눈치를 살피고 양심을 속이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실수를 실수로 인정하면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실수에 대해 변명을 하려거든 내 앞에 서지마라"-공장시설에 문제가 생겼을 때 태광산업 강석면 부장에게
이 창업주가 사업장을 내려갈 때마다 공장장들이 긴장했다고 한다. 이 창업주는 공장 안에 쌓인 먼지 한톨, 시든 나뭇가지 하나까지 직접 챙겼다고 한다. 강을 다 건넜다고 안심했다가 다리가 끊겨 오도 가도 못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항상 긴장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성공 여부는 요행이나 연줄이 아니라 노력과 성실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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