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에 와서 걸었던 길 중 조용히 가슴이 충만했던 곳이 있다. 고창읍성 뒷길이다. 이곳의 남쪽 골짜기 끝에서부터 솟은 물이 실개천이 되고 다시 모인 곳이 노동저수지다. 고창읍성 뒷길 걷기는 노동저수지에서부터 시작된다.
고창읍성의 남쪽, 그러니까, 정문인 북쪽의 공북루 반대편 성벽 너머에 고창 자연마당이 조성되어 있다. 이 자연마당은 아이들과 함께 오든 홀로 오든 누구나 와서 걷거나 앉아 한가롭고 편안한 시간을 즐길 수 있도록 조성된 자연공원이다. 여기서 바라보는 노동저수지 주변 풍경이 즐겁다. 최근 이 자연마당에서 노동저수지 건너편의 소박한 정자인 매월정까지 부교를 설치하고 있어 곧 물 위를 걷는 즐거움이 추가될 듯하다.
매월정에서 남쪽으로 700미터쯤 노동저수지 상류로 향해 가면 저수지 가까이에 느티나무 고목의 소담스러운 작은 숲이 보이는데 이 속에 취석정 (醉石亭)이 자리 잡고 있다. 멀리서 보면 작은 숲이지만 가까이 가면 정자 울타리 주변의 씩씩한 나무 여남은 그루가 만들어내고 있는 멋진 풍경이다.
취석정은 노계(蘆溪) 김경희(金景熹 1515 ~ 1575)가 명종 1년(1546)가 건립한 정자다. 1545년에 있었던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게 되자 낙향해 이곳에서 학문을 논하며 후진을 양성했다.
무릉도원을 노래했던 시인 도연명이 술에 취하면 바위 위에 누워 자곤 해서 파인 흔적이 남게 되었다는 이 바위를 ‘연명취석(淵明醉石)’이라 했는데 이를 줄여 취석(醉石)이라 불렀다고 한다. 술에 취해 취석 위에 누우면 신선을 부러워할 필요 없으니 욕심 없는 한가로운 삶을 의미하는 이름이라고 한다.
정자의 울타리 안과 밖에 큼직한 바위가 여럿 자리 잡고 있어 정자 주인도 세상에 대한 욕심 내려놓은 도연명의 삶을 닮고자 취석정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근래에 고인돌로 판명이 나긴 했지만, 정자를 세울 당시엔 그저 가끔 술기운이라도 오르면 호기롭게 누울 수 있는 운치 있는 바위였을 것이다. 이 바위 중 하나에 醉石亭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오른쪽과 아래에 작은 글씨로 ‘蘆溪金先生遺阯 先生手筆 (노계김선생유지 선생수필)이 희미하다. 이곳이 노계 김 선생의 터였고 바위면의 醉石亭 석 자는 노계 선생이 직접 썼다는 뜻이겠다.
취석정에서 나와 마을 안길로 접어들었다. 남쪽의 산자락 끝에서부터 북쪽의 고창읍성 근처까지 이어지는 4km가 채 되지 않는 얕은 골짜기 양편에 드문드문 집이 있다. 마을 앞을 흐르던 개천은 그 옆으로 자동차도로가 생기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잘 정비되어 옛날 굽이굽이 흐르던 모습을 잃었지만, 여전히 맑은 물을 노동저수지로 보내고 있었다. 취석정 근처를 벗어나면 집이 띄엄띄엄 보이며 산과 숲이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이 길을 계속 걸어 올라가 남쪽 끝의 언덕을 넘어가면 축령산 자락의 문수사까지 이어진다.
언덕에 오르기 전 작은 저수지를 지나면서 오른쪽 야트막한 산줄기의 양지바른 곳에 꽤 큰 묘지가 보인다. 국창 만정 김소희 (晩汀 金素姬)묘소 가는 길이라는 표지판을 따라 묘지 앞에 서니 왼쪽에 이름 석 자 새겨 넣은 비석이 눈에 거슬린다. 돌북에 그의 제자들 이름과 그 제자들의 제자들 이름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더러 눈에 익은 이름도 있다. 묘소 가장자리에 사포정 (沙浦亭) 정자가 하나 서 있다. 묘소를 찾는 이들이 잠시 쉬어가도록 후학 중 한 사람이 세웠다는 현판이 있다.
묘소에서 돌아 나와 긴 골짜기를 가로막고 있는 언덕 위에 서서 보니 그 아래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손바닥만한 땅이 보인다. 동쪽의 양지바른 언덕 가운데쯤 잘 지은 기와집이 보인다. 언젠가 문수사에 다녀오며 길가의 안내 표지판에서 보았던 ’김기서강학당‘이다.
돈목재(敦睦齋) 김기서(金麒瑞)는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었다. 유교적 이상 정치를 구현하고자 급진적 개혁을 시도하던 정암이 중종 14년(1519) 죽임을 당하고 그 살육의 광풍 속에서 수많은 신진 사림들과 함께 김기서도 설 자리를 잃었다. 이후 김기서는 이곳에 와 은거하며 강학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했다. 27년 후에는 그의 아들 김경희가 취석정을 지었다.
김기서강학당을 돌아보고 다시 올라오면 걷기가 행복한 오솔길이 기다리고 있다. 오래전부터 있었던 야산 능선길인데 시작부터 끝까지 길 양쪽의 나무들이 가지를 뻗어 하늘을 덮고 있다. 길엔 야자매트를 깔아 걷기에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바람 소리 속에 새 소리가 섞여 다가오니 함께 걸으며 굳이 말하지 않으려 한다. 이 길 끝은 고창읍성 뒤 자연마당이다. 걷고 나면 짙은 여운이 남는 길이다.
오근식은 1958년에 태어났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대학에 진학했다.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2019년 7월부터 1년 동안 제주여행을 하며 아내와 함께 800km를 걷고 돌아왔다. 9월부터 고창군과 공무원연금공단에서 마련한 은퇴자공동체마을에 입주해 3달 일정으로 고창을 여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