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법 제15부(재판장 민성철)는 21일 고(故) 곽예남·김복동씨 등 피해자와 유족 20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을 각하했다. 각하는 소송 요건을 갖추지 못했기에 본안을 심리하지 않고 내리는 결정을 뜻한다.
이날 재판부는 이 사건에서 일본 정부에 ‘국가면제’를 적용해야 한다고 봤다. 국가면제는 한 국가의 법원이 다른 국가를 소송 당사자로 삼아 재판할 수 없다는 국제법상 원칙이다.
재판부는 “국제관습법과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외국’인 피고(일본)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은 대한민국이 여러 차례 밝힌바 같이 외교적 교섭을 포함한 대내외적 교섭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고 판시했다.
각하 이유로는 ▲국제사법재판소(ICJ)의 판례 ▲국가면제를 인정하는 것이 대한민국 헌법 질서에 반하지 않는다는 점 ▲2015년 12월28일 위안부 한일합의 효력이 존속한다는 점 ▲국가면제 예외조항 등이 국내법으로 정해지지 않은 점 등이 설명됐다.
ICJ 판례로는 ‘페리니 사건’이 언급됐다. 독일에 강제동원됐던 이탈리아인 원고 루이키 페리니의 이름을 딴 사건이다. 지난 2004년 이탈리아 법원은 2차 세계대전 중 이탈리아를 점령한 독일군의 불법 행위에 대해 독일 정부가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독일은 “주권국가의 행위는 다른 주권국가의 사법 심사 대상이 될 수 없다”며 국가면제를 내세워 ICJ에 제소했다. 이탈리아도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주권면제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이에 응했다. 결과는 독일의 승리였다. ICJ 판사 15명 중 12명은 독일의 손을 들어줬다.
다만 재판부는 이번 판결이 강제동원 피해자의 청구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위안부 피해자들은 어린 시절 피고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었다”며 “지난 시간 동안 대한민국이 국내외적으로 기울인 노력과 성과가 피해자들의 고통에 비하면 미흡했다. 2015년 위안부 합의도 피해자에게 만족스러운 결과라고 보기 어렵다”고 이야기했다. 이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청구권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배상) 청구 문제가 모두 해결됐다고 보는 것도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피해자와 피해자지원단체 등은 재판부의 이번 판결에 깊은 유감을 표했다. 피해자 이용수씨는 재판이 끝난 후 기자들과 만나 “너무 황당하다”며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ICJ에 갈 것이다. 이 말밖에 할 말이 없다”고 울먹였다.
정의기억연대와 나눔의집 등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단체 네트워크도 “‘인권의 최후 보루’로서 책무를 저버린 재판부를 규탄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 단체는 “지난 30년간 일본군성노예제 문제를 고발하고 국제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 회복을 위해 투쟁한 피해자들의 활동을 철저히 외면했다”며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는 퇴행적 판결이다. 인권중심으로 변화해가는 국제법의 흐름을 무시한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이들 단체는 피해자와 협의해 항소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앞서 진행된 일본을 상대로 한 1차 소송의 결과는 달랐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는 지난 1월 고 배춘희씨 등 위안부 피해자 12명이 같은 취지로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일본의 불법행위에 국가면제를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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