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5부(민성철 재판장)는 21일 고(故) 곽예남·김복동씨 등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유족 20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을 각하했다. 각하는 소송 요건을 갖추지 못해 본안을 심리하지 않고 사건을 끝내는 것을 뜻한다.
이날 재판부는 피고인 일본 정부에 ‘국가면제’가 적용돼 재판이 성립될 수 없다고 봤다. 국가면제는 한 국가의 법원이 다른 국가를 소송 당사자로 삼아 재판할 수 없다는 국제법상 원칙이다.
재판부는 “국제관습법과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외국’인 피고(일본)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은 대한민국이 여러 차례 밝힌바 같이 외교적 교섭을 포함한 대내외적 교섭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국제사법재판소(ICJ)가 전범국 독일의 국가면제를 인정한 사건 등이 예시로 언급됐다.
고 배춘희씨 등 위안부 피해자 12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해 승소한 1차 소송과는 다른 결론이다. 지난 1월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김정곤 부장판사)는 일본의 국가면제를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비록 이 사건 행위가 국가의 주권적 행위라고 할지라도 국가면제를 적용할 수 없다”며 “예외적으로 대한민국 법원에 피고에 대한 재판권이 있다고 본다”고 판시했다. 이어 “국가가 피해자들에게 극심한 피해를 가한 경우, 최종적 수단인 민사소송에서 재판권이 면제된다고 해석하는 것은 불합리하고 부당한 결과가 도출된다”며 일본 정부는 피해자들에게 1억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승소로 끝난 1차 소송도 암초를 만났다. 지난 2월 법원 정기인사로 재판부 구성원이 바뀌었다. 새롭게 구성된 민사합의34부(김양호 부장판사)는 지난달 1차 소송 관련해 “일본 정부가 부담할 비용이 없다는 점을 확인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1차 소송 선고 당시, 소송 비용은 피고인 일본이 부담하라는 내용이 포함됐다. 그러나 새 재판부는 “외국에 대한 강제집행은 해당 국가의 주권과 권위에 손상을 줄 우려가 있다”며 “이 사건의 소송비용을 강제집행하게 되면 국제법을 위반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피해자를 대리한 법무법인 지향의 이상희 변호사는 “이번 (2차 소송) 판결로 지난 1월 (국가면제를 인정하지 않은) 판결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며 “법원은 피해자 인권을 위한 최후의 보루다. 인권의 흐름을 역행한 판결에 대해 다시 한번 유감을 표한다”고 말했다.
법원의 판결에도 배상은 지연되고 있다. 일본 기업 측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이미 배상이 끝난 문제이기에 재차 배상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모르쇠’로 일관하는 일본 기업에 대해 법원은 한국 내 자산 압류명령을 내렸다. 시일이 지나 일부 기업에 대해서는 자산 매각 명령도 가능해졌다. 압류한 자산을 매각, 현금화해 피해자에게 위자료로 건넨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이행되지 않고 있다. 피고 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철주금은 압류명령에 불복, 즉시 항고를 표명했다. 매각명령 사전절차 등에 응하지 않으며 시간을 끌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미쓰비시중공업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대리하는 법무법인 지음의 김정희 변호사는 “기업 측에서 (압류명령에 대해) 계속 항고, 불복하고 있다”며 “항고 등을 할 때마다 공시송달을 해야 하는데 송달 절차가 오래 걸려 늦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변호사는 “현재도 법원에서 매각명령을 내리는 것이 가능하지만 최대한 신중하게 절차를 밟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일본은 1938년부터 모집·관 알선·징용 등으로 형태를 바꿔가며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다. 국내를 비롯해 일본과 사할린, 남양군도 등으로 800만명이 끌려갔다. 이중 최소 60만명 이상은 죽거나 행방불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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