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철소 협력업체에서 일하는 A씨는 최근 작업 투입 전 조회 시간 안전관리를 강조하는 대표의 말을 귀가 닳도록 듣고 있다. 위험한 작업 현장에서는 안전이 제일 중요한 덕목이지만,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다고 하니 몇 주 전부터 더 안전을 강조하는 분위기다. 또 안전관리자 추가 채용한다고 최근 공고를 냈다.
#2 화학기업에서 일하는 B씨는 오늘 아침 본사로부터 새로운 안전관리 지침을 하달받았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과 함께 기존 안전관리 지침을 새로운 지침으로 대체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최고 수준 안전관리 체제 가동 중이지만, 안전사고가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기에 본사에서 전 사업장에 새 안전 지침을 전달했고, 조만간 직원 대상으로 관련 교육도 진행한다고 한다. 현장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지만, B씨는 한 번 더 안전을 강조한다는 차원으로 받아들였다.
#3 경기도 내 국가산업단지에서 엔지니어링 업체를 운영하는 중소기업 대표 C씨는 중대재해처벌법 걱정에 지난밤 밤잠을 설쳤다. 각종 보도를 통해 대기업들은 이미 로펌 법률자문 등으로 안전대책 마련에 나섰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재정 여력이 없는 영세한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노무 컨설팅마저 부담스럽다. 안전담당자에게 안전관리에 더욱 신경 써 달라는 말은 전달하긴했지만, 당장 어디서부터 고쳐나가고 대응해 나가야 할지도 막막하다.
27일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됐다. 1년간 유예기간을 뒀지만, 당장 법이 시행되자 기업들은 긴장하고 있다. 최근 한 달 사이 대규모 산업재해가 잇따르자 중대재해처벌법 1호 처벌 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에 일부 기업은 사업장 내 작업을 중단했다. 특히, 광주 화정동 아이파크 붕괴 사고로 10대 건설사들을 중심으로 내달 6일까지는 작업을 멈췄다.
법 시행 첫날, 재계와 노동계는 엇갈린 반응을 내놨다. 재계는 처벌 위주의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에 강한 우려를 드러낸 반면, 노동계는 엄정한 법 집행을 촉구했다. 양측 모두 법 개정을 촉구 했지만, 방향은 달랐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입장문을 내고 중대재해법 시행에 강한 우려를 드러냈다. 경총은 중대재해 근절을 위한 법 취지에는 동의하나, 처벌에 초점이 맞춰진 중대재해처벌법은 조속한 개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경총은 “지금 중대재해처벌법은 과도한 처벌 수준과 법률 규정 불명확성으로 의무준수를 위해 노력하는 기업조차도 처벌의 공포서 자유롭지 못하다”며, “정부가 마련한 해설서조차 모호하고 불분명해 기업 입장에서는 누가, 무엇을, 어느 정도 이행해야 법 준수로 인정되는지 알기 어렵다”고 밝혔다. 또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으로 인한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수사 범위는 사고원인과 직접 관계된 의무사항으로 한정해야 한다”면서, 처벌을 위한 수사는 기업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노동계는 엄정한 법 집행을 촉구하면서 50인 미만 사업장에도 조속히 확대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80% 이상의 중대재해는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집중되기 때문에 중대재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전 사업장 전면 적용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경영자 단체를 향해서는 중대재해처벌법 무력화 시도를 중단하라고 목소리 높였다.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은 “이 법은 기업 처벌을 위한 게 아니고, 현장서 노동자가 죽거나 다치는 경우를 막기 위한 것”이라며, “지난해 법이 제정되고 1년간 우리가 목격한 것은 처벌을 피하기 위한 기업의 분주한 움직임뿐이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5인 미만 사업장은 법의 대상조차 포함되지 않고 50인 미만 사업장은 총 3년의 유예기간을 받게 됐다”며, 법 개정 필요성을 역설했다.
산업 현장은 평상시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일부 기업들은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에 맞춰 보강된 안전관리 지침을 내리기도 했지만, 큰 틀에서는 변화가 없었다. 다만, 평소보다 주의를 기울인 상태서 작업에 돌입했다는 후문이다.
한 제조업계 관계자는 “안전관리를 최우선 가치로 두고 있기 때문에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이 됐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게 없다”며 “앞으로도 안전관리에 만전을 기해 산업재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한 제철업계 관계자는 “이번 달 제철 현장서 중대재해 사고가 몇 건 생기면서 평소보다 더 긴장한 가운에 작업에 임한 건 사실”이라며, “주변 협력사에게 물어보니 안전관리 인력을 보강한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들은 상대적으로 안전관리 인력과 체계가 부족한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에 가장 긴장하고 있다.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안전관리책임자를 채용하고 안전관리를 하고 있지만, 경영책임자가 직접 안전관리 예산을 배정하고, 들여다봐야 한다고 하니 경영자들은 막막하다고 하소연한다. 재정 여력이 있는 중소기업들은 이미 노무 컨설팅을 받는 사례도 있지만, 대다수 기업은 이마저도 못한 상황이다.
경기도 국가산업단지 내에서 기업체를 운영 중인 한 경영자는 “안전관리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데도 사고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난다”며 “모든 상황을 예측할 수 없어 불안하고, 요새는 잠도 잘 못 잔다”고 말했다. 이어 “일부 중소기업 대표들은 코로나19 때문에 사업 자체도 힘든데 사고가 나면 처벌한다고 하니 사업을 그만둘까도 고민하는 걸로 안다”고 말했다.
황인성 기자 his1104@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