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아이돌 시스템 자체가 사람을 숙성하게 놔두지 않는다.” 세계적인 그룹 방탄소년단을 이끄는 RM은 지난달 유튜브에 올린 ‘찐 방탄회식’ 영상에서 이렇게 털어놨다. 더 높은 곳에 이르기 위해 휴식을 포기한 K팝 시스템의 어두운 이면을 짚은 발언이었다. 2010년대 국민적인 히트곡을 남긴 걸그룹 멤버는 과거 쿠키뉴스와 인터뷰에서 “자고 일어나면 여기(행사장)가 어딘지도 모른 채 춤을 추곤 했다”고 말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는 말로 대표되는 K팝 시장의 자본주의적 효율 속에서, 아티스트가 ‘나’를 탐구하기란 사치에 가까웠다.
탈진을 부르는 과잉 노동에서 벗어나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던 두 아티스트가 긴 겨울잠을 끝내고 팬들 앞에 다시 선다. 주인공은 그룹 원더걸스 출신 선예와 그룹 카라 출신 니콜. 2세대 아이돌 전성기를 이끌던 두 사람은 각각 육아와 자기개발을 위해 10년 가까이 연예계를 떠났다. 숨 가쁘게 돌아가던 삶에 제동을 건 두 여성 아이돌은 자신만의 춤을 추며 새로운 우주로 향한다.
“이제 진짜 나를 꺼내”…경력 단절 깬 선예의 선언
선예는 원더걸스 멤버로 활동하던 10대 후반부터 ‘민 엄마’로 불렸다. 다른 멤버들을 살뜰히 보살피는 성격 덕분이었다. 오죽하면 박진영 프로듀서가 “선예를 믿고 원더걸스를 만들었다”고 했을까. 이런 선예가 26일 공개한 신보 타이틀곡 ‘저스트 어 댄서’(Just a dancer)에선 확 달라졌다. 착하지 않은 눈빛으로 카메라를 내려다보며 “내 안에서 피어나는 자유로운 필(Feel·느낌)”에 흠뻑 빠진다. 소속사 블록베리크리에이티브는 “예술가로서 선예의 본능과 자신감, 자신다운 춤을 추겠다는 뜻을 담은 노래”라고 설명했다.
‘단지 춤꾼’(Just a dancer)으로 다시 무대에 서기까지, 선예는 먼 길을 돌아왔다. 그는 원더걸스로 활동하던 2013년 결혼해 캐나다로 터전을 옮겼다. 현역 아이돌로는 이례적인 선택이었다. 같은 해 첫 아이를 출산하면서 선예는 ‘경단녀’가 됐다. 한때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세계를 누볐던 아이돌 스타에게도 출산과 육아는 벗어나기 어려운 굴레였다. 그가 tvN ‘엄마는 아이돌’을 통해 무대에 복귀하기까지 무려 3231일이 걸렸다.
선예는 신보 ‘제뉴인’(Genuine)에서 자신을 꾸미던 표현을 거두고 진실한 내면을 끄집어낸다. 그는 소속사를 통해 “진실한 나의 모습을 찾는 것, 쉬운 일 같지만 어렵다”면서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방황하고 주저앉았던 시간을 지나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법을 배웠다”고 전했다. 선예는 음반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리얼 미(Real Me·진짜 나)”를 되찾고, “도망치지 않아”라고 팬들에게 약속한다. 선예는 ‘저스트 어 댄서’ ‘제뉴인’ ‘글래스 하트’(Glass Heart) 등 신곡 4곡 가사를 직접 썼다.
니콜이 유럽을 여행하며 깨달은 것
2014년 카라를 탈퇴하고 일본에서 활동하던 니콜은 2018년 유럽으로 훌쩍 떠났다. 그는 두 달 여 간 배낭을 메고 유럽 이곳저곳을 오가다가 문득 우울감에 빠졌다고 한다. 기획사에 소속돼 쉴 틈 없이 일하다가 모처럼 얻은 자유가 오히려 자신을 막막하게 만들어서다. “스케줄이 늘 꽉 차 있다가 (활동을) 쉬게 되니 몸이 붕 뜨는 기분이었어요. 항상 뭔가를 향해 달려가곤 했는데, ‘이젠 뭘 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유마저 부담스러웠어요.” 26일 서울 장충동 크레스트72에서 만난 니콜이 들려준 얘기다.
니콜은 카메라와 조명을 벗어난 두 달 동안 자기 속도로 걷는 법을 익혔다. 그는 “혼자 여행하며 새로운 풍경을 담다보니 ‘숨 쉴 시간을 가져도 괜찮다. 시간은 모두에게 다르게 흐른다. 나만의 타이밍이 있다’는 걸 배웠다”고 했다. 20대 후반 뒤늦게 사춘기를 겪은 이의 ‘인생 공부’였다. 니콜은 이후 꾸준히 한국에서 낼 솔로 음반을 작업하다가 지난 11일 신생 기획사 JWK엔터테인먼트와 전속계약을 맺고 컴백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이렇게 탄생한 곡이 27일 정오 공개되는 ‘유에프오’(You.F.O)다. 니콜은 미확인비행물체(UFO)에 ‘당신은 우리의 우주를 찾을 것’(You will find our galaxy)이라는 의미를 더해 곡 제목을 지었다. 그는 새로 시작하는 설렘을 청량한 선율에 녹여 들려준다. 그는 “사랑이든 일이든, 새로운 뭔가를 맞이했을 때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려 했다”며 “내가 이 곡에서 느낀 설렘과 밝은 에너지를 전달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