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 수치가 정상이고 간경화가 없더라도 혈액 내 간염 바이러스 수치가 위험 구간에 있으면 간암 발생 위험이 최대 8배까지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에 따라 B형 간염 치료를 시작할 때 바이러스 수치를 적용하도록 기준을 바꾸면 향후 15년간 국내 간암 환자가 4만명 줄어들 수 있다는 전망도 제시됐다.
임영석 서울아산병원 소화기내과 교수 연구팀은 간 수치가 정상 범위에 해당되고 간경화가 없는 국내 B형 간염 환자 가운데 혈중 간염 바이러스 수치가 중간 수준(혈액 1mL당 100만 단위·6 log10 IU/mL)인 경우 간암 위험이 가장 높았고 대만, 홍콩 등 동일 조건의 다국적 B형 간염 환자 7000명에서도 같은 결과를 확인했다고 16일 밝혔다.
만성 B형 간염은 간암 원인의 70%를 차지해 적절한 시기에 치료를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 간암 발생을 절반가량 줄여주는 안전한 항바이러스제가 있지만, 간 수치가 크게 상승했거나 간경화로 진행된 경우에 한해 건강보험 급여를 적용 받아 항바이러스제 치료를 시작할 수 있다.
연구팀은 지난 2020년 서울아산병원의 환자 빅데이터를 활용한 선행연구를 통해 간경화가 없고 간 수치(ALT·알라닌 아미노전이효소 수치)가 정상인 만성 B형 간염 환자에서 간염 바이러스 수치가 혈액 1mL당 100만 단위(6 log10 IU/mL) 근처일 때 간암 발생이 가장 높다는 사실을 세계 처음으로 보고했다.
또한 해당 환자들은 장기간의 간염 치료에도 간암 발생 위험도가 절반 정도 낮아질 뿐 여전히 가장 높은 위험도를 유지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간암 발생 위험이 간염 바이러스 수치에 비례해 선형적으로 증가하며, 간염 치료를 시작한 후에는 바이러스 수치가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에 간암 발생 위험과 간염 바이러스 수치는 큰 연관이 없다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연구팀은 간염 바이러스 수치가 100만 단위에서 간암 위험이 가장 높고, 이보다 더 높아지거나 낮아질수록 간암 발생 위험은 점진적으로 감소해 간염 바이러스 수치와 간암 위험이 비선형적인 포물선 관계를 그린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에 따라 간암 위험도를 낮게 유지하려면 복잡한 B형 간염 치료 개시 기준을 혈중 바이러스 수치만을 기준으로 단순화하고 조기에 치료를 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연구팀은 20여년간 기존 학계에서 믿어온 지식을 사실에 맞게 정정하기 위해 대규모 다국적 환자를 대상으로 외부 검증에 나섰다. 연구팀은 국내에서 간 수치 상승이나 간경화가 없는 B형 간염 환자 6949명의 데이터를 활용해 간암 발생 위험을 예측하는 모델(reREACH-B·Revised REACH-B)을 개발했다. 환자의 혈중 바이러스 수치 외에 연령, 성별, 혈소판 수, 간 수치, B형 간염 항원 양성 여부 등 총 6개의 간암 발생 주요 지표를 포함시켰다.
이후 대만과 홍콩, 한국에서 동일한 조건의 만성 B형 간염 환자 7429명을 대상으로 외부 검증을 실시했다. 그 결과, 평균 10년 이상의 추적 기간 동안 간암 발생은 국내 환자군에서 435건이었으며 다국적 환자군에서는 467건으로 나타났다. 간암 발생 위험도는 두 환자군 모두에서 혈중 간염 바이러스 수치가 1백만 단위(6 log10 IU/mL) 정도일 때 가장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팀은 연구 결과를 토대로 간암을 효과적으로 예방하려면 간염 바이러스 수치를 기준으로 B형 간염 치료를 시작해야 하며, 이를 통해 국내에서 향후 15년간 4만명의 간암 환자 발생을 예방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임영석 서울아산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간암의 주 원인인 B형 간염의 치료 기준이 엄격하다보니 간염 환자의 20%만 항바이러스제 처방을 받고 있는 실정”이라며 “이번 연구 결과에 따라 그동안 근거가 부족해 치료 사각지대에 놓였던 만성 B형 간염 환자들에게도 항바이러스제 치료 급여가 적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한편 이번 연구 결과는 내과학 분야 세계적 권위지인 미국내과의사협회 공식 저널 ‘내과학연보(Annals of Internal Medicine, 피인용지수 19.6)’ 최신호에 게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