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칼럼은 정신과 전문의 정동청 원장이 영화와 드라마를 정신의학적 관점에서 풀어보는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_편집자 주
‘홈랜드(Homeland)’라는 제목의 미국드라마를 소개합니다. 이라크에서 실종됐던 미국해병 니콜라스 브로디가 8년 만에 구출돼 귀향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모두 그를 영웅으로 대접하지만 단 한 사람만은 그에게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습니다. 알 카에다에게 잡혀있던 미군 포로가 변절했다는 정보를 접했던 CIA 요원 캐리 매티슨은 니콜라스 브로디가 그 변절한 포로라는 의심을 거둘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주인공이 알 카에다의 첩자라는 증거를 잡기 위해 주변을 맴돌면서 감시하기 시작합니다. 집에 몰래카메라와 도청장치를 설치하고, 합동 심문에서도 그의 행적을 하나하나 따져 묻습니다.
니콜라스 브로디가 포로로 잡혀있던 8년 동안 그의 삶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사망한 줄 알았던 부인 제시카가 자신의 절친한 동료와 만나왔다는 건 그에게 견디기 힘든 현실이었습니다. 부인도 변해버린 남편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합니다. 남자는 악몽을 꾸다가 부인의 팔을 멍이 들 정도로 심하게 잡기도 하고, 침대가 불편해 바닥에서 혼자 잠을 자기도 합니다.
주인공을 감시하던 캐리는 이런 주인공의 모습에 연민을 느낍니다. 캐리와 계속 마주치게 되던 브로디 역시 왠지 모를 편안함을 캐리에게서 느끼죠. 숨기고 싶은 자신의 가장 내밀한 아픔까지 그녀가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알 카에다의 테러리스트로 의심받는 해병과 그를 의심하는 CIA 요원은 그렇게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캐리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단 걸 알게 된 브로디는 분노에 차 관계를 끝냅니다. 그러던 중 CIA는 부통령 암살 첩보를 입수하고, 여주인공은 다른 요원들과 함께 테러리스트를 쫓다가 부상을 당합니다.
사실 캐리 매티슨은 양극성 장애 환자였고 폭발 당시에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투약을 중단한 상태였습니다. 테러가 발생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극심한 압박감과 브로디와의 관계에서 받은 스트레스, 거기에 폭발의 충격이 더해지면서 캐리의 ‘조증 삽화’가 재발하고 맙니다. 입원을 해야 할 정도로 증상이 심각했지만, CIA 요원으로 계속 활동하기 위해 의사인 언니의 도움을 받아 집에서 치료를 받기로 결정합니다.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도 캐리의 뇌는 쉴 수 없었습니다. 조증 때문에 생각의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진 상태에서 자신이 그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테러의 큰 틀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맞추고자 브로디에게 연락을 해 상황을 설명하고 관련된 정보를 얻으려 하지만, 브로디는 오히려 CIA에 연락을 해서 캐리가 자신을 불법적으로 감시한 일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관계를 맺은 사실까지 폭로하고 맙니다. 그로인해 여주인공은 CIA에서 쫓겨나고 자신이 정신과 질환을 갖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려지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오해하고 배신했다는 사실에 그녀는 괴로워하지만, 테러를 막겠다는 그녀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사건의 단서를 계속 추적하던 캐리는 부통령이 저격당할 뻔한 현장을 목격합니다. 브로디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으며 그가 더 큰 테러를 준비하고 있다고 믿게 됩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테러를 막으려고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정신 나간 여자로 취급할 뿐 아무도 진지하게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과연 캐리 매티슨의 생각대로 니콜라스 브로디는 테러리스트일까요? 그렇다면 캐리는 부통령 암살 시도를 막을 수가 있을까요?
정신과 의사로서 이 드라마가 흥미로웠던 건 저격수였던 주인공이 어떻게 대량 살상을 시도할 만큼 철저하게 세뇌될 수 있었던가 하는 점입니다. 일상에서 세뇌라는 표현을 가끔 사용하긴 하지만, 세뇌가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고 세뇌를 통해 사람의 생각을 얼마만큼 바꿀 수 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세뇌를 통해 충성스러운 군인이 조국의 심장에 칼을 겨누는 테러리스트로 바뀔 수 있을까요?
세뇌의 이론적 배경은 조건반사로 유명한 파블로프의 실험에 근거한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신 것처럼 파블로프는 종소리를 들려준 다음 개에게 음식을 제공해 종소리만 들어도 개가 침을 흘리게 만드는 조건반사 현상을 처음으로 관찰했습니다.
그런데 파블로프의 실험실이 홍수로 물에 잠기면서 실험실에서 키우던 개들이 물에 빠져 죽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일부 살아남은 개들이 있었는데, 이 개들에게서 과거 형성된 조건화 반응이 더 이상 관찰되지 않았습니다. 이를 흥미롭게 여긴 연구자들이 다른 개들에게 조건 반사를 학습시키고 똑같이 물에 빠트렸더니 마찬가지로 조건 반사가 사라지는 것이 관찰되었습니다.
파블로프는 이런 현상을 ‘초역설적 단계’라고 불렀고, 이는 생명에 위협이 될 만한 외상을 경험하게 되면 기존에 학습된 행동 양식이 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도 심각한 외상을 경험하게 되면 생각과 행동이 180도 바뀌게 된다고 합니다.
드라마의 주인공도 지속적인 고문을 통해 이러한 ‘초역설적 단계’에 놓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마치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를 포맷한 듯 한 상태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세뇌의 1단계에 불과합니다. 하드디스크를 포맷했다면 새로운 운영체계를 설치해야 컴퓨터가 작동이 되겠죠?
포맷이 된 두뇌에 새로운 운영체계를 설치하는 과정은 한국전쟁 때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혔던 미군들을 통해 알려진 바 있습니다. 당시 포로로 잡힌 약 7000명의 미군 중 1/3이 중국에 협조를 하였고, 심지어 21명의 포로는 귀환을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미국 역사상 처음 있었던 일이었죠. 이 당혹스러운 사태를 설명하기 위해 미군은 생환한 포로들을 대상으로 심층적인 조사를 진행하였고, 그 결과 중공군이 사용한 세뇌 기법이 상세히 알려지게 됐습니다.
그들이 사용한 기법으로는 ‘사소한 요구의 강요’, ‘가끔씩 즐겁게 하기’, ‘위협’, ‘신분 격하’, ‘지각의 통제’, ‘고립’, ‘무력감의 유발’ 등입니다. 쉽게 말하면, 포로가 스스로의 운명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시키면서 자신이 가진 신념의 작은 부분부터 양보하도록 해 종국에는 포로를 굴복시키는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정신과적인 용어를 사용하자면 공격자와의 동일시(identification with the aggressor)라는 개념을 이용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을 학대하고 괴롭히는 사람과 스스로를 동일시하게 된다는 얘기죠. 앞서 드라마의 주인공 니콜라스 브로디 역시 오랜 고문과 학대 속에 자아가 무너진 상태에서 테러리스트에게 동화되었을 겁니다. 인질들이 인질범에게 동화되어 이들을 변호하게 되는 스톡홀름 신드롬도 비슷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양극성 장애를 가진 CIA 요원 캐리 매티슨에 대한 생생한 묘사입니다. 캐리가 클로자핀(clozapine)이라는 약물을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동료가 미쳤냐고 물어보자 기분장애 때문에 먹는 약이라고 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클로자핀은 항정신병약물 중의 하나이며, 항정신병약물은 환청이나 망상과 같은 정신병적 증상을 치료하는 약물인데 조증 증상이나 우울 증상의 치료에도 효과가 있습니다.
정신과 의사들도 진료실에서 비슷한 상황을 접할 때가 있는데, 양극성 장애 또는 우울증 환자에게 항정신병약물을 처방했다가 내가 왜 이런 약을 먹어야 하냐며 항의를 듣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정신과 약물에 대한 편견 때문에 이처럼 안타까운 상황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여주인공 캐리가 약 때문에 집중하기 힘들다며 투약을 중단하고는 병이 재발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투약 중단과 재발이라는 문제는 정신과 질환의 치료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제입니다. 약만 잘 챙겨먹으면 아무런 문제없이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분들이 약을 끊고 병이 재발해서 학업을 중단하거나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신과 질환 치료의 성공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투약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주인공처럼 약을 끊고 조증인 상태에서 두뇌 활동을 극대화시킬 수도 있지 않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일반적으로 조증 상태가 심해질수록 사고의 비약이 일어나고 논리적인 사고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결국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커지게 됩니다.
미국 드라마 ‘홈랜드’는 정신과 의사로서 흥미로운 드라마일 뿐만 아니라 스토리의 전개도 뛰어나고 주인공들의 캐릭터도 섬세하게 묘사된 잘 만들어진 드라마입니다. 시즌1이 2011년에 처음 방영되었고 미국에서는 시즌7까지 방영되었습니다. 시즌1부터 주욱 감상한다면 아직 가시지 않은 무더위를 잊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서울청정신건강의학과 정동청 원장 eastblue071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