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의 실상을 알려 달라”

“팔레스타인의 실상을 알려 달라”

[김양균의 현장보고] 팔레스타인 르포… 분리된 삶, 부서진 꿈⑤ <하>

기사승인 2019-09-19 02:54:04

팔레스타인 지역 내 위치한 이스라엘 정착촌은 피점령국 주민에 대한 공격 요새로써 작동되고 있다. 현재 팔레스타인 전역에 유대 정착촌이 들어서고 있다. 피점령지에 점령국 주민이 이주하는 것은 국제법상 불법이다. 국제사회는 이스라엘 정착촌 확대에 우려하고 있지만, 이스라엘 정부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에 정착촌 조성은 더욱 확대되는 추세다. 

정착촌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원 거주민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을 현저히 침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당국의 묵인(혹은 동조)하에 수자원 등의 수탈을 포함해 방화나 폭력 등 물리적 위협이 되풀이되고 있다. 위협의 방식은 생계 수단을 파괴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팔레스타인 나블루스 남쪽의 부린마을 사건이다. 세 곳의 정착촌으로 둘러싸인 이 마을은 유대 정착민의 횡포에 신음하고 있다. 

지난달 17일 이곳을 방문했다. 마을 활동가 갓산에게서 비교적 최근의 공격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17년 5월과 6월 극단주의 정착민 일부는 군의 비호 아래 공격을 감행했다. 공격의 강도 자체가 강하지는 않다. 무리지어 몰려와 돌을 던지는 등의 방식에 불과하지만, 이들의 의도는 모욕을 주는 행태를 취하고 있었다.    

지난해 10월에도 공격은 이어졌다. 강도가 높아졌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올리브나무를 훼손한 것이다. 올리브나무는 거주민의 주된 생계 수단이기 때문에 파괴행위는 적잖은 경제적 피해를 야기했다. 그렇다고 적극적 저지를 할 수도 없었다. 무장한 군인들이 공격자의 뒤를 봐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올해 7월의 공격은 심각했다. 경작지에 불을 지른 것이다. 

갓산 활동가를 따라 마을 곳곳을 둘러봤다. 무장한 군인들은 도로 한복판에 진을 치고 기자 일행을 예의주시했다. 심지어 학교 뒤의 공터에 접근하는 것조차 막고 있었다. 이곳 모두 원래부터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땅이었다. 

◇ 하캄의 이발소 

이튿날 팔레스타인의 대도시 라말라로 향했다. 라말라는 대사관과 행정기관이 밀집되어 있어 행정수도 기능을 하고 있다. 고층 빌딩과 대형 쇼핑몰이 즐비한 현대적 도시의 외관을 띠고 있었다. 우리가 아는 팔레스타인의 이미지와는 전혀 딴판이다. 도로에는 벤츠, 아우디 등 고가의 차가 달리고, 번화가에는 세련된 수트 차림에 한껏 멋을 낸 미남미녀가 많다. 

그러나 이곳에도 유대 정착촌에 의한 피해가 보고되고 있었다. 정착촌 ‘베이트에일’ 주위로 분리장벽이 세워져 있고, 각 구간마다 경비 초소가 설치돼 있었다. 장벽은 한참을 이어지다 가운데가 뚝 끊겨 있었다. 벽과 벽 사이에 팔레스타인 사람 소유의 집이 있었다. 대다수 팔레스타인인이 재산 증명을 하지 못해 살던 집에서 쫓겨났지만, 집주인 하캄은 가까스로 소유지 증명을 해냈다. 

하캄의 집 안마당에 있던 가건물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과거 이발소로 쓰였던 듯 오래된 이발소 의자와 거울 따위가 있었다. 흥미가 돋았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이러한 호기심보다 하캄과 그의 가족이 처한 사정이 매우 심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은 라말라의 세련됨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두 달 전 군인들이 집을 공격했어요. 총을 쏘아댔죠. 근처에서는 불도 났습니다. 지난 겨울부터 군인 여러 명이 들이닥쳐 저녁 6시부터 자정까지 집에 머무릅니다. 우릴 감시하는 이유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집밖에서 도로를 막아 출입을 제한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캄의 가족을 향한 정착민의 욕설과 모욕적 언사는 일상이다. 하캄과 그의 가족을 향한 위협의 이유는 하나, 떠나라는 메시지이다. 그러나 하캄은 이곳을 떠날 수 없다. 이 집에서만 17명이 나고 자랐다. 방 네칸에서 23명이 거주한다. 턱없이 비좁은 환경이지만 이스라엘 당국은 증축 허가를 내어주지 않는다. 대신 감시카메라를 설치했다. 반면 인접한 정착촌에는 7월 650채의 가구 건립 승인이 떨어졌다.   

“군인들은 아이와 여성의 방을 뒤집니다. 어린 자녀에게 고압적인 태도로 계속 질문을 던지곤 하죠. 특히 집에 남자가 없을 때 들이닥치면 대단히 불안합니다. 불안하게 만들어 이곳을 떠나게 하려는 속셈이죠.” 

‘불청객’이 수시로 집을 드나들자 아이들은 하교 후에도 어른들이 귀가하기 전까지 이웃집으로 피해있는 형편이다. 자녀를 향해 돌을 던지거나 집으로 총을 쏘는 일도 적지 않다. 하캄은 “아이들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며 분개했다. 

“아버지의 고향은 아파시아입니다. 벤구리온 공항 근처죠. 멀지 않은 거리에 고향이 있지만, 저 조차도 아파시아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전 난민캠프에서 태어났어요. 아이들에게 고향이 어디에 있는지 지도로만 알려줄 뿐이죠.”

◇ 포기를 강요당하는 삶

“팔레스타인인으로 산다는 건 많은 부분에서 포기를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라말라에서 만난 유엔개발계획(UNDP) 소속 칼리드 활동가의 말이다. 해외 유학을 희망하던 그에게 이스라엘 정보부는 ‘불허’ 통보를 내렸다. 아버지의 수감 기록을 문제 삼았다. 칼리드 말고도 현장에서 만난 팔레스타인 사람들 상당수는 자신 혹은 가족이 투옥된 경험을 갖고 있었다. 이유는 여럿이지만, 원인은 하나다. ‘이스라엘에 저항한 죄’. 칼리드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다른 사람인데 왜 이러한 불이익을 받아야 하는지 답답했지만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그는 사회 활동가로 진로를 틀었다. 현재 칼리드 활동가는 라말라에서 팔레스타인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고 있다. 중동문제와 관련된 활동도 병행 중이다.  활동가로의 삶을 선택하고 나서야 그는 답을 얻었다. 주변 사람들도 자신과 같은 불이익을 당했던 것이다. 

훗날 운 좋게(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유학은 극히 제한적인 경우에만 허락된다) 노르웨이에서 유학할 기회를 얻었다. 정착할 수도 있었지만 끝내 귀국을 선택했다. 이유가 궁금했다. “활동가이기 이전에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가족들을 더 나은 환경에서 살게 하고 싶진 않았나요?” 칼리드 활동가는 동포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했다. “저만 성공해서는 도저히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는 팔레스타인의 실상을 한국에 알려달라고 했다.  

◇ 밥 얻어먹을 염치

부린마을에서 취재가 얼추 마무리되자 점심때를 한참 지나 있었다. 갓산 활동가는 기자 일행을 그의 집에 데려갔다. 노모는 퍽 호화로운 음식을 내왔다. 초벌구이한 닭고기를 밥과 함께 쩌낸 ‘마클루바’. 별미였다. 결혼식 등의 잔칫상에 오르는 음식이라고 했다. 오랜만에 맛본 쌀밥에 입은 호사를 누렸지만 내심 신경이 쓰였다. 넉넉지 않은 형편. 생면부지의 이방인을 위한 만찬. 식사 내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마음이 쓰였다.  

식사 후 갓산은 기자에게 USB를 건넸다. 그 안에는 유대정착민의 폭력 기록 영상이 담겨 있었다. 영상을 촬영한 ‘죄’로 그는 2년간 복역했다. 영상 탈취를 위해 군인들이 그의 집을 수차례 수색했지만 그는 증거영상을 가까스로 지켜냈다. 수감되면서까지 지켜낸 폭력의 증거. 그렇지만 그는 영상 제공을 위한 어떤 요구나 조건도 달지 않았다. 

그날 밤 나블루스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모스크로부터 저녁 기도를 알리는 이국적 선율이 아름다웠다. 밤은 깊어오는데 멀리서 섬광이 번쩍였다. 기자는 저널리즘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지 못한다. 진실보도가 무엇인지 제대로 배운 적 없다. 다만 밥 얻어먹을 염치 하나 기억할 뿐. 

*기획 연재 <팔레스타인 르포… 분리된 삶, 부서진 꿈>의 첫 챕터는 여기서 마무리됩니다. 두 번째는 팔레스타인의 보건의료, 여성·아동에 대한 연재로 이어집니다. 

나블루스, 라말라=김양균 기자 angel@kukinews.com

김양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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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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