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그 날의 정전은 예고 없이 왔다.
모처럼 저녁식사를 함께한 남편이 소파에 누워 TV 뉴스를 보던 때였다. 시험을 앞둔 아들은 제 방에 틀어박혀 있었고 아직 어렸던 딸은 식탁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돌연 불이 꺼졌다.
막 설거지통에 손을 담갔던 나는, 곧 불이 들어올 거라 생각해 수세미를 그대로 주무르고 있었다. ‘정전이다’ 외쳤던 아들도 그 뿐이었고, 창밖을 내다본 가장도 우리 집만 그런 게 아님을 확인하곤 더 말이 없었다. 바로 옆에서도 ‘엄마, 엄마’를 찾던 딸만 양초를 찾겠다며 툭탁거렸다.
어두운데서 부딪치기나 할까봐, 손을 끌어 온가족이 거실에 모여 앉았다. 평소엔 보지도 않았던 달이 하늘 어디에 떠있었던지 어둠 속에서도 점점 사위가 밝아졌다. 불빛이 사라지니 달빛이 보이는구나, 다 같이 한동안 하늘을 바라보았다. 처음 달을 보는 듯이….
"정전이라, 오빤 시험공부 안 해서 좋겠다"는 딸의 말에, 나는 "불이 들어오면 오빤 더 늦게까지 해야지" 해놓곤, 달빛에도 얼굴이 달아오른다고 느꼈다.
아들의 시험걱정은 자연스레 아들의 적성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고 가족들의 꿈 이야기로 이어졌다. 생각처럼 금세 불은 들어오지 않고, 우리 가족은 창가 밝은 곳에 무릎을 맞대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기 초에 사준 아들의 운동화가 벌써 작아진 것도 몰랐고 새로운 친구가 생긴 것도 몰랐다. 가수와 의사와 수영선수가 되고 싶다던 딸이 장래희망을 화가로 바꾼 것도, 그 이유가 남이 시키는 대로 연습하거나 공부하지 않고, 맘대로 그리고 싶어서란 것도 처음 들었다. 밑반찬을 안 좋아하는 남편이 어릴 땐, 어묵볶음을 제일 좋아했던 것도, 고등학생 때까지도 대통령이 되려 했던 것도 그때야 알게 되었다.
뒤늦게 촛불이라도 켜려고 초를 찾아 불을 붙이는 순간, 연극이 끝나듯 불이 들어왔다. TV가 저절로 떠들고 냉장고가 돌아갔다. 달빛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모두들 각자 ‘할 것’을 하러 자리로 돌아갔다.
불이 켜진 뒤의 ‘할 것’이, 불이 꺼졌을 때에 우리가 ‘한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일까. 불빛이 사라지니 더욱 환하게 보였던 달빛과 그 속에서 더 가까이 알게 된 가족의 이야기가 아쉬워, 나는 그 어두움을 좀 더 붙잡고 싶었다.
가족들과 달을 봤던 그 밤 이후에도, 어쩌면 너무 목표만을 위해 살아온 것 같다. 왜 그것을 이루려는지, 진정한 목적은 잊었던 것 같다. 매해 새로운 목표로 세상도 더 발전하고 편리해졌지만 궁극의 ‘행복과 안녕’은 놓치고 있었다. 오늘의 건강과 평안이 깨지면 그 어떤 성공도 한 순간에 부질없어지는 것을….
시간이 정지된 듯 일상의 많은 것이 멈춘 지금, 그 밤이 생각난다. 개개인의 건강이 매일같이 집계되고 나라의 안전지표가 되는 시간이 오다니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던 봄을 지나고 있다. 다르게 생각하면, 평범한 한 사람의 건강과 미미한 나의 삶도, 국가적으로 꽤 소중하게 지켜져야 할 존재가 된 것도 같다.
일상의 소중함과 진정한 행복, 세상과 내 자신의 의미까지 되돌아보게 되는 요즘이다. 어둠속에서야 다시 깨달았던 달빛처럼, 새로운 때가 와도 이 시간을 기억할 수 있을까. 지금 소중하고 간절한 걸 그때는 좀 더 잘 지키고 살 수 있을까. 새 날을 기다려본다.
이정화(주부/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