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한국전쟁 70주년이다. 한국전쟁은 이제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 되고 있다.
많은 국제정치학자들은 한국전쟁을 국내전이자 국제전이라고 부르고, 제한전(limited war)이자 전면전(total war)이라고 부른다. 즉 한국전쟁은 이중적(二重的) 성격을 갖고 있는 전쟁이라는 의미이다. 한국전쟁을 이념적으로 분석하면 자유주의 이념과 공산주의 이념간의 이데올로기 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기간을 역사학자 존 루이스 개디스(John Lewis Gaddis)는 ‘냉전(Cold War)’이라 말한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한국전쟁은 미소간의 양극대결이 가져온 냉전체제의 대리전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진영 남한과 구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진영 북한간의 체제대결은 민족내전의 성격을 뛰어넘어 미소 대리전의 성격이 강했던 전쟁이었다.
오늘날 한국전쟁의 결과로 고착된 38선이라는 분단선 역시 한국전쟁 이전에 이미 강대국들에 의해 공인된 분할선(分割線)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인 미국과 구소련 사이에 38선은 한반도 분할선으로 국제적으로 공인되었다. 그리고 이 38선이라는 분할선은 5년 정도 지속되었고 1950년 6.25 전쟁의 발발로 무력화 되었다. 6.25 전쟁 발발로 무너진 38선은 미국, 구소련, 중국이 참전하면서 원상복귀가 논의되다가 1953년 7월 휴전선으로 전환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김일성의 무력통일이라는 정치군사적 목적과 김일성의 적화 프로젝트에 적극 협력한 중국의 마오쩌둥, 구소련의 스탈린간의 38선 무력화 공모 때문이었다. 중국이 국공내전을 통해 공산화되는 것과 미국이 아시아 태평양 방위선 소위 애치슨 방위라인(Acheson line)을 그으면서 한반도를 제외한 것을 보면서 김일성은 자신의 통일과업을 위한 국제환경이 매우 유리하게 조성되었다고 판단했고, 여기에 6.25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더 이상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오판을 하여 인류역사상 보기드문 대재앙을 초래했다.
그럼 중국은 왜 한국전쟁에 개입하게 되었을까? 원래 중국의 마오쩌둥은 대만과의 통일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의 전쟁발발은 생각치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일성이 마오쩌둥을 만나 자신의 3단계 전쟁계획을 설명했다. 첫째, 38선 특정지역으로의 병력 집중, 둘째, 위장평화공세, 셋째, 옹진에서의 개전과 국지전의 전면전화가 바로 그것이었고 이에 대한 설명을 들은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이 계획에 찬성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오쩌둥은 혹시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일본군이 다시 개입할 우려는 없는가를 끝없이 의심했고 김일성은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말했다. 마오쩌둥은 일본이 전쟁에 개입하게 되면 전쟁은 매우 장기화 될 것이고 곧바로 미국이 참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김일성에게 전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김일성은 미국인들은 극동에서 군사적으로 개입하겠다는 의향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고, 미국은 싸우지 않고 중국을 떠났으므로 한국에서도 그와 같이 소극적으로 대응할 것으로 관측된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이에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만약 미국이 참전한다면 소련은 참전이 어렵겠지만 자신들은 병력을 파견해 돕겠다고 약속했고, 제국주의가 38선을 넘는다면 반드시 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중국의 평가에 의하면 소련이 미국과 38선을 국제적으로 합의한 당사자였으므로 이를 분쇄하는 전쟁에 참여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점이 있었음에 비해, 중국은 한반도와 관련해 아무런 국제적 의무가 없으므로 북한이 필요하면 직접 병력을 파견해 도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소련은 미국과의 제3차 세계대전을 회피하는 대신 중국을 동원했다. 중국은 전쟁 전개 과정에서 북한에 대한 도덕적인 간접 지원과 미국이 참전한다면 참전한다는 약속 이외에 물리적인 직접 지원도 했는데 이는 북한의 전쟁준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중국이 북한에 대해서 이렇게 적극적인 지원 의사를 밝히게 된 것은 중국이라는 자국안보를 위한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가 매우 중요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국공내전동안 인민해방군 내에서 중국을 도왔던 조선인들이 조국 북한을 원조할 병력의 여유가 생겼고 북한 또한 이를 당연히 원했으며 만주가 어려울때 조선인들의 투쟁은 중국 공산당의 승리에 결정적인 요인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국공내전 당시인 1946년 7월부터 1949년까지 중국 공산당은 북한을 후방기지로 활용했다. 공산당의 마오쩌둥 군대가 국민당의 장제스 군대에게 밀려 삼십육계의 줄행랑을 칠때는 중국 본토를 벗어나 북한까지 밀린끝에 구사일생한 적도 있었다. 또한 역으로 북한 인민군이 유엔군에 밀려 더 이상 북한에서 싸울 수 없는 상황을 맞았을때는 북한인민군 역시 압록강 넘어 만주로 피신하여 살아 남은적이 있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하면 북한 인민군과 중국 공산당간의 관계는 동맹이상의 동지의식으로 뭉쳐 있고 순망치한의 관계를 벗어나기 어려운 나라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중국의 국공내전당시 미국은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을 지원했고 구소련의 스탈린은 공산당의 마오쩌둥을 후원했다. 그런데 이때 스탈린의 마오쩌둥 후원은 매우 독특해 보인다. 중국의 국공내전당시 북한은 구소련의 스탈린 체제하에 있었고 스탈린이 자신의 영향권 아래에 있던 북한을 중국 공산당의 후방기지로 활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던 것은 만일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국민당이 승리하게 되면 미국이 중국 전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소련을 위협하게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한국전쟁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매우 꺼리고 간접후원하는 형식을 갖춘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만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여 그 전쟁에 미국이 개입하면 소련은 미국과 전면전을 펼쳐야 하고 그렇게 되면 3차 대전이 발발할 수 있어서 스탈린은 그 점을 극도로 우려했기 때문이다. 물론 마오쩌둥 역시 한국전 개입이전에 김일성에게 수차례에 걸쳐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묻고 또 묻는다. 그것을 김일성은 노련한 상황논리와 속임수를 통해 마오쩌둥을 속이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중국은 김일성의 속임수에 넘어가 한국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져들었고 대만과의 영토통일을 놓쳤다. 그리고 미국과 70년 동안이나 적대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경제발전을 잃었다.
땅을 치고 후회한 것을 넘어서서 통한의 오판으로 역사의 도약기를 소진해 버린 것이다. 이런 중국의 쓰라린 한국전 개입의 실책은 1970년 죽의 장막을 뚫고 들어간 미국의 키신저 전국무장관과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총리간의 대화에 잘 드러나 있다. 다시는 한반도내 남북한 소국들의 분쟁에 중국과 미국이라는 대국들이 휘말려 역사적 우를 범하지 말자는 통한의 메세지가 바로 그것이다. 꼬리가 몸통을 흔들도록 한반도를 방치해서도 안된다는 미중합의도 이때 나왔다.
그러니까 한국전쟁은 중국에게 한반도에서 발생한 전쟁에 개입해서도 안되고 그런 전쟁의 혼란이 발생토록 방치해서도 안되며 전쟁에 개입하여 미국과 또다시 적대적 관계에 빠지는 것도 원치 않는다는 쓰라린 교훈을 얻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발발 70년이 된 오늘의 시점에서 본다면 과연 중국의 이런 전쟁의 교훈은 잘 지켜질 수 있을까?
그럼, 실제로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함으로써 무엇을 얻었을까? 지정학적으로 중국 안보에 완충지대(buffer zone)라 할 수 있는 북한이 아직도 중국과 함께 공산주의라는 동질적 이데올로기 국가를 유지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로부터 체제위협을 덜 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중국은 자신들이 만일 한국전쟁에 개입하지 않고 한국전쟁의 결과로 한반도에서 미국의 후원을 받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한 한국중심의 통일국가가 태어났다면 이로부터 엄청난 체제위협을 받았을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한국전쟁에 개입함으로써 대만과의 영토통일의 기회를 놓쳤고, 70년 동안이나 미국의 적대국가로 존속하면서 경제난을 겪어야 했지만 공산주의 체제는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일정한 위안을 삼고 있다. 바로 중국의 이런 쓰라린 과거의 경험은 김일성이 일으켰던 한국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짐으로써 다시는 이런 함정에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는 중요한 경험을 얻게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중국의 한국전경험은 과연 한반도에서의 또다른 전쟁 발발을 원하고 있을까? 그리고 미국이 개입한 전쟁에 또다시 중국이 개입할 의지를 갖고 있을까? 그래서 미국의 적대국가로 다시 남기를 원하는 것일까?
그럼 한국은 6.25 전쟁을 통해서 무엇을 지켰고 무엇을 얻었는가? 우리는 한국전쟁을 통해서 오늘의 세계 12대 경제대국이 될 수 있는 대한민국의 3대 기둥을 지키고 얻었다. 한국전쟁을 통해 얻은 대한민국의 3대 기둥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치적 민주주의, 경제적 자유시장주의, 군사안보적 한미동맹관계이다. 오늘의 한미동맹은 한국전쟁이라는 잿더미로부터 건져올린 대한민국 최고의 군사안보정책이자 국가의 핵심전략이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세 개의 기둥중의 한 기둥이다.
우리는 한국전쟁을 통해 통일국가를 잃었고 아직도 분단국으로 남아 있지만, 한반도 절반의 영토내에서나마 인류보편적가치인 자유를 지켜냈고 그 자유라는 가치의 반석 위에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시장주의를 키워 냈다. 그리고 피눈물나는 전쟁과 절반의 영토를 잃은 분단상잔의 고통과 그 희생의 대가로 우리는 단군이래 최대의 군사안보정책이라 할 수 있는 한미동맹을 얻었다. 그래서 군사안보적 한미동맹을 통해 자유, 민주, 시장을 지키고 보호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전쟁의 잿더미로부터 세계 12위의 경제번영국가로 발돋음할 수 있었다.
오늘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이 위대한 대한민국의 3대 기둥을 다시 생각해 본다. 오늘의 대한민국의 민주, 자유, 평화, 번영, 시장은 안녕한가? 강대국들의 흥정의 대상이 된 우리의 지정학(geopolitics)은 안전한가? 분단체제의 철조망 너머로 총부리를 맞대며 동족상잔의 적대감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동족간의 전쟁의 위협은 사라지고 있는가?
세계패권을 꿈꾸는 미국과 중국간의 한반도 영향권 확보를 위한 치열한 패권경쟁속에 한반도의 생존전략은 무엇인가? 한반도에서 또다시 미중간의 군사적 충돌의 발생 가능성은 없는가?
70년전 오늘의 한국전쟁이 미군철수와 에치슨 선언으로 미국이 한반도를 아시아태평양 방어권역으로부터 제외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면 오늘 당장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또다른 한국전쟁의 발발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한미동맹이 이완된 틈을 보이자 러시아와 중국의 전투기들이 우리의 영공과 영해를 휘젓고 다니는 상황이 발생하고 일본의 독도점령 계획이 실행화되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열린 자주방위의 핵심축인 한미동맹을 해체하려는 정치적 발언들은 무슨 의도와 목적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래서 오늘 우리는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우리민족은 이 전쟁을 통해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가를 깊이 반추(反芻)해 봐야 한다.
우리가 한국전쟁을 통해 진정 얻은 것은 자유와 한미동맹이었다. 그것이 오늘의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간의 발전의 격차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대한민국 번영을 가져온 자유와 한미동맹은 지금 더욱 잘 유지되고 있는가? 문재인 정권하에서 자유의 들꽃은 더욱 만발하고 한미동맹은 혈맹관계로 더욱 공고화 되고 있는가? 아니면 자유의 꽃은 시들고 한미동맹은 해체의 위기를 맞고 있는가?그래서 오늘의 우리는 70년 전의 한국전쟁의 비극을 애써 잊고 있고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으로 기억속에서 사라지고 있는가?
오늘을 사는 우리 국민이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사실이 있다. 하나는 지금 당장 남북한간의 전쟁이 발생하면 중국은 남과 북사이에서 어느나라를 지원할 것 같은가?미국처럼 한국편에서 북한과 전쟁할 수 있는 나라라고 생각하는가? 미국과 중국 가운데 어느나라가 한국을 지켜 줄 수 있는 나라인가?남과 북이 다시 전쟁을 한다면 중국이 자국과 접경지역을 두고 있는 북한을 팽개치고 한국을 도울 것이라고 생각하는가?오늘의 한반도의 지정학적 상황은 70년전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그 상황으로부터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둘째,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전 세계인들에게 알려지게 된 최초의 계기(사건)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6.25 한국전쟁이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존재가 전세계에 알려진 첫번째 사건이 바로 전쟁을 통해서였고 우리는 그런 나라에 생존해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6.25 한국전쟁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니,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이 되도록 망각의 강물에 흘려보내서는 절대 안 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장성민 세계와동북아평화포럼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