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지난 6월 태안 신진도 고가(古家)에서 조선 수군(水軍)의 명단이 적힌 수군 군적부(軍籍簿)와 한시(漢詩)를 발견한 이후 수거된 벽지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수군진촌(水軍鎭村)의 역사와 서정을 느낄 수 있는 다수의 한시 등을 추가로 발견했다고 23일 밝혔다.
태안 신진도 고가는 상량문에 적힌 ‘도광(道光, 청나라 도광제 선종의 연호) 23년’이라는 명문으로 1843년에 건립된 것이 확인된 바 있다. 고가에 거주했던 후손 최인복씨 증언에 따르면 가옥은 대청을 중심으로 ㅁ자형 건물 배치이며 260평의 대지에 방 5칸, 광 6칸, 부엌 3칸, 소 외양간 1칸, 말(馬) 우리 등을 갖추고 있었다.
문화재청 실측 결과 현재는 ㄷ자형 구조만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광 6칸이 존재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안흥진 수군을 관리했던 관가(官家)의 건물로 추정된다.
새롭게 발견된 한시 「聞新設開宴四方賢士多歸之」(문신설개연사방현사다귀지: 새로 짓고 잔치를 베푼다는 소식을 듣고 사방에서 선비들이 모였다)는 1843년 7월 16일 태안 신진도 안흥진 수군의 관가(官家)로 사용될 집을 짓고 다음 해 안흥진 첨사(安興鎭 僉使) 조진달(趙鎭達)의 재임 기간인 1844년에 잔치를 베풀어 사방의 손님을 맞이했음을 알 수 있다. 안흥량(安興梁)은 태안 앞바다 일대 신진도, 마도, 관장목을 연결하는 물길이 험한 구역이다.
또 다른 한시의 제목은 「黃麥打麥羊 出家家」(황맥타양출가가: 집집마다 찰보리를 타작하여 거두어 가다)인데, 내용에는 ‘군포를 내라는 조칙이 있는데도, 갑자기 지난밤 보리를 보내어 왔구나’(布詔行令曾如此 忽然昨夜麥秋至)라는 문장이 있어 이 가옥이 안흥진 수군을 관리하기 위해 군포(軍布)나 곡식을 거두어 관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흥진 수군의 중요 임무 중 하나였던 조운선의 안흥량 통과를 위한 호송과정에서 발생한 인명의 희생과 이를 비유한 한시도 있다. 이 시는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 699-759)의 오언절구 한시 「조명간」(鳥鳴澗, 새가 시냇가에서 울다)의 형식을 빌려 능숙한 초서체(草書體)로 ‘사람이 계수나무꽃 떨어지듯 해 밤은 깊은데 춘산도 적막하다’(人間桂花落 夜靜春山空, 인간계화락 야정춘산공)라고 하여 수많은 인명이 안흥량 앞바다에 빠져 희생된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실제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안흥량을 왕래하는 선박 중 뒤집혀 침몰하는 것이 10척 중 7~8척에 이르고, 1년에 침몰하는 것이 적어도 20척 이하로 내려가지 않고, 바람을 만나 사고가 많으면 40~50척에 이른다’(1667년인 현종 8년 윤 4월조)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사고가 많은 해역의 특성으로 인하여 수군과 조운선을 관리하는 이 고가(古家)에서는 ‘無量壽閣’(무량수각: 영원한 생명을 기원하는 건물)’이라는 문구도 발견됐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이번 태안 신진도 수군진 유물 발견을 계기로 민간에 전승되어 내려오는 안흥진 수군과 관련한 개인문집과 문학작품을 찾아 번역할 예정이다. 관련된 주요 문집으로는 김득신(金得臣, 1604-1684)의『백곡집, 栢谷集』, 김규오(金奎五, 1729-1791)의『최와집, 最窩集』,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의『은송당집, 恩誦堂集』등이며, 수군진의 문학과 역사 연구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24일 오후 1시에 태안해양유물전시관에서 개최하는 ‘제2회 태안 안흥진의 역사와 안흥진성’ 학술대회에서 해당 유물들을 공개할 예정이다.
태안 신진도 고가 인근 초등학교 주변으로는 1970~80년대까지만 하여도 조선시대의 건물로 추정되는 전통 기와집이 다수 남아있었다고 한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해당 지역이 수군진과 관계되는 관리와 수군이 거주했던 지역으로 판단돼 종합적인 학술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하고 추가조사를 계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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