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지성이 없어도 인간의 몸은 작동할 수 있다. 호르몬을 분비하고 아이도 낳을 수 있다. 마치 글을 몰라도 말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글을 알면 말도 달라지듯, 지성을 갖추면 모든 것의 격과 수준이 달라진다. 삶의 방식이 풍성해지고 그 풍성함이 다른 사람의 삶에도 넉넉함을 안겨준다. 그러니까 틈을 벌리는 지성에서 한 사람의 격과 수준이 나오는 것이다.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선택'의 문제이다.
쾌락과 지성 그리고 중독과 영성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아무리 멋진 자동차나 명품가방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시시해진다. 더 좋은 자동차와 가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 쾌락 적응은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꿈에 그리던 상대를 만나 관계를 맺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방의 장점이 아니라 약점에 대해 '깊이 숙고'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를 갈망한다. 우리는 쾌락 적응을 통해, 만족이 불가능한 쳇바퀴 속에서 스스로를 소진한다. 인간은 실현이 불가능한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불행하다. 우리는 한 가지 욕망을 실현했을 때, 만족스러울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 욕망이 실현되었을 때, 욕망은 진부한 일상이 되고 만다. 쾌락을 선택하면 중독으로 가고, 지성을 선택하면 영성으로 이어진다.
코로나19의 재확산으로 영업을 더 제한하는 등 어려움이 더해지고 있다.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고요와 비움으로 평상심을 유지하고, 공부하는 즐거움으로 더위를 극복할 생각이다. 내가 ‘장자’을 읽으면 좋아했던 문장이다. "瞻彼闋者(첨피결자) 虛室生白(허실생백) 吉祥止止(길상지지) 夫且不止(부차부지) 是之謂坐馳(시지위좌치)".
이 건 한 편의 시다. "저 빈 곳을 보라/텅 빈 방에 밝은 햇빛이 찬다./행복은 고요함 속에 머무르는 것 고요함 속에 머무르지 못하면/이를 일러 '앉아서 달림(坐馳, 좌치)이라 한다." (오강남 역).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선택’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