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출퇴근을 볼모로 삼고 있다.”
“예산 확보를 해 달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출근길 시위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잠시 행동을 멈췄던 이들은 윤석열 당선인의 인수위가 출범하자 다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장애인들은 정부의 ‘예산 편성’을 요구하며 다시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시민들 항의받은 장애인들
전장연은 29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3호선 경복궁역에서부터 4호선 혜화역까지 출근길 선전전을 펼쳤다. 이들은 경복궁역에서 3호선에 탑승한 뒤 충무로에서 4호선으로 갈아탔다. 이후 명동역까지 이동한 뒤 반대편 열차를 타고 한성대 입구까지 향했다. 그곳에서 이들은 다시 반대 방향으로 이동해 최종목적지인 혜화역에 도착했다. 장애인들은 혜화역에서 마지막 선전을 펼치고 해산했다.
시위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본격적으로 시위가 시작되고 취재진이 몰리자 아찔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서울교통공사의 지원과 도우미들의 안내로 큰 사고는 없었지만 휠체어의 바퀴가 전동차와 열차 사이에 끼는 등 제대로 된 이동이 어려웠다. 좁은 폭으로 인해 플랫폼 이용도 쉽지 않았다.
소란도 있었다. 장애인들은 출근길 불편을 호소하는 시민들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충무로역에서 환승을 기다리던 장애인은 환승 엘리베이터 앞에서 한 시민으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객차 안에서도 불편함을 호소하거나 큰 목소리로 장애인들을 비난하는 시민들이 있었다.
장애인들은 현재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통해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장애인 권리 예산 △장애인권리법안 등 두 가지로 압축된다. 이중 장애인권리법안에는 △장애인 권리 보장법 △장애인 탈시설 지원법 △장애인 평생교육법 △특수교육법 등이 포함돼 있다.
결국 이들이 주로 주장하는 내용의 핵심은 ‘국가의 책임’이다. 장애인 정책을 담당해야 할 정부가 오히려 장애인들을 방치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법’은 있다… 그런데 ‘예산’이 없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이 있다. 해당 법안은 지난해 12월31일 본회의 문턱을 넘었다. 여기에는 장애인들의 이동과 관련한 내용이 대폭 반영됐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장애인을 위해 마련한 법안이 오히려 정부가 예산을 편성하지 않아도 될 이유가 됐다.
해당 법안 제16조에는 ‘국가 또는 도(道)는 제1항에 따른 특별교통수단의 확보 또는 제2항에 따른 이동지원센터의 설치에 소요되는 자금의 일부를 지원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이 법안 통과 당시 일부 의원의 발의법안이 위원회 대안으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강제 조항은 기재부의 반대 탓에 임의 조항으로 변경됐다. 기재부가 버틸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이 조항 덕분이다.
특히 장애인들은 ‘이동권’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동권과 관련한 예산이 확보되지 않으면 교육‧시설 밖 생활 등도 사실상 무용지물인 탓이다. 시위를 멈췄던 장애인들이 예산 확보를 위해 다시 거리로 나선 이유다.
이날 지하철 시위의 선봉에 섰던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은 “처음에는 법이 없어서 못 한다고 해서 법을 만들었다. 그런데 법이 없어서가 아니었다”라며 “결국 의지가 필요하다. 모든 것이 비장애인 중심으로 돌아가다 보니 그 속에서 장애인들은 배제되고 격리돼 왔다”고 지적했다.
또한 “우리가 더 잘 살기 위해서 얘기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아주 기본적인 것을 얘기하는 것”이라며 “시민들의 반발은 아쉽지만 이렇게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더불어 정부의 태도 변화를 촉구했다. 이 회장은 “장애인 택시의 경우 대중교통의 대체 수단이자 특별교통수단”이라며 “이게 지자체장에게 부여하는 의무가 되다 보니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해당 지자체를 넘어서면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 매우 부족하다”라고 비판했다.
아울러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광역이동지원센터’ 설치와 예산 지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예산 투입과 관련한 규정이 ‘임의조항’인 탓에 정부가 머뭇거리고 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회장은 지역 균형의 측면에서도 중앙정부의 예산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도시는 그나마 괜찮은데 중소도시나 시골 등은 지자체의 예산이 열악해 장애인이 이동할 수 있는 수단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들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문제 해결 나선 정치권… “넓게 바라봤으면” 당부도
출근길 시위로 인해 불편함을 호소하는 시민들이 많아지자 정치권에서도 팔을 걷는 모양새다.
일단 윤석열 당선인과 국민의힘은 즉각 행동으로 나섰다. 임이자 인수위 사회문화복지분과 간사는 29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 서울교통공사 경복궁영업사업소 회의실에서 전장연 관계자와 만났다.
임 간사는 “인간의 존엄성은 죽을 때까지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며 “현재 장애인이 겪는 고통과 애로사항을 청취하기 위해 왔다. (인수위는) 이들이 겪는 애로사항을 함께 하겠다”고 했다. 아울러 “다른 장애인 단체 얘기도 듣겠다”고 강조했다. 원론적인 표현이지만 소외됐던 이들의 소리를 듣겠다는 의미였다.
결국 전장연 측도 응답했다. 이들은 지하철 탑승 시위를 잠시 멈추기로 했다. 전장연 측은 이날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 국민의힘이 제대로 검토할 것을 기다리는 의미로 내일(30일)부터 답변 시한인 4월 20일까지 승하차 시위를 잠정 중단한다”고 밝혔다.
민주당 역시 장애인들과의 소통 강화에 나섰다. 박지현 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은 이날 진행한 전장연과의 간담회에서 “장애인 이동권은 장애인이 당연히 누려야 할 헌법상 기본권이다. 세계 8위의 선진국이라고 자부하는 대한민국에서 아직도 이런 기본적인 권리를 지키기 위해 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서야 한다는 현실이 매우 안타깝다”고 돌아봤다.
또한 이동권을 포함한 장애인 정책에 더욱 신경 쓰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박 위원장은 “이동권만 해결된다고 장애인 차별이 해소되는 것은 아닐 것”이라며 “교육에서도 차별받지 않아야 하고, 시설보다 지역사회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하고, 장애인들도 비장애인과 동등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활동 지원 서비스도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박홍근 원내대표 역시 “(장애인 문제는) 개인의 의지와 그 가족의 노력, 주변의 봉사로 풀 수 있는 게 분명 아니다. 국가와 사회가 책임 있게 제도를 통해서 개선해 공동체 사회로 나가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말했다. 특히 “그동안 장애인 당사자와 그 가족들이 떠안았던 책임을 이제는 국가와 사회가 제대로 나눌 수 있도록 하겠다. 관련 제도도 개선하고 필요한 예산도 확보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정의당은 그동안 장애인들과 함께 꾸준히 목소리를 내왔다. 이날 전장연 시위 현장에서도 정의당 소속 정치인들이 함께 참여했다.
배복주 정의당 부대표는 조금 더 넓은 관점으로 장애인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배 부대표는 28일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장애인 이동권 문제에 있어 사실 예산이 가장 중요하다. 법안 통과로 명분을 세웠는데 기재부가 못한다고 해서 난감한 입장”이라며 “시민들이 오해하는 측면도 있다”며 아쉬움을 표시했다.
또한 “이게 서울만의 문제가 아니다. 결국 특별교통수단과 관련해서는 균형 발전과 지방의 재정자립도의 문제이기도 하다”라고 지적했다.
이날 장애인과 함께 시위에 나섰던 나경채 전 정의당 공동대표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 전 공동대표는 “경사로나 엘리베이터 등 장애인들의 요구로 만들어진 시설들이 있다. 이러한 시설들이 만들어진 이후에 그 혜택을 보는 것은 장애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노인들, 무릎이 안 좋은 분들, 일시적인 사고로 휠체어나 목발을 사용하는 사람들, 유모차를 이용하는 시민들도 혜택을 보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장애인 권리 보장 예산을 매번 정치권이 약속을 해왔다. 하지만 실제로 실행이 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며 “우리 사회가 합리적인 문제 해결의 과정을 밟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분석했다.
장애인 ‘탈시설’ 논란은 여전히 논쟁 중
다만 전장연 측이 외친 주장 중 ‘탈시설’과 관련해서는 논란이 예상된다. 단체마다 입장이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전국장애인거주시설부모회는 29일 서울시 종로구 경복궁역에서 전장연의 시위에 앞서 ‘탈시설 및 시설 폐쇄 법안 철회’를 요구했다. 이들은 “탈시설은 발달장애인과 그 보호자가 당사자”라며 “전장연은 탈시설 관계자가 아니다. 그동안 발달장애인을 먹이로 탈시설을 추진해왔다”고 비판했다.
또한 “발달장애인과 지체장애인 정책은 달라야 한다. 탈시설은 결국 탈시설 사업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박경석 전장연 대표는 “탈시설 문제는 국가 책임의 문제다. 엄마들의 책임이 아니다”라며 “결국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서 든든하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국가가 책임을 다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최기창 기자 mobydic@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