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진선규는 영화 ‘카운트’(감독 권혁재)를 부담보다 설렘으로 기억한다. 긴 무명을 거친 그는 데뷔 20주년에 첫 주연작을 만났다. 살벌한 조선족 킬러(‘범죄도시’)와 어수룩하지만 숨은 실력자였던 형사(‘극한직업’)를 거쳐 아픔을 간직한 전 복싱 국가대표, 현 고교 체육교사 박시헌 역을 만났다. “촬영할 땐 이야기를 잘 만드는 것만 생각했어요. 오히려 지금이 더 긴장되네요.” 진선규는 특유의 선한 미소와 함께 눈을 반짝였다.
지난 15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진선규에겐 행복감과 열정이 함께 느껴졌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작품에 금세 녹아들었다. 경남 진해에 살던 숫기 없던 소년, 아마추어 복싱 선수의 아들, 체육교사를 꿈꾸던 조용한 학생. 진선규의 어린 날은 ‘카운트’ 속 박시헌과 꼭 닮았다. 1988 서울올림픽 복싱 금메달리스트 출신인 박시헌은 진해중앙고에서 체육교사로 일하며 복싱부를 맡아 유망주를 키워간다. 진선규는 처음부터 ‘카운트’의 세계로 자신을 내던졌다.
“시헌이 가진 가치관, 사고, 삶과 마주하는 태도가 저와 90% 일치했어요. 연기를 설계하기보다 제가 느끼는 마음을 그대로 영화에 묻혀야겠다 싶었죠. 이 마음을 관객분들이 느껴주시길 바랐거든요. 고향 사투리로 연기하는 건 새로웠어요. 북한말, 연변 말투, 강원도 사투리보다는 훨씬 쉽더라고요. 하하.”
‘카운트’는 현 복싱 국가대표팀 감독 박시헌의 실화를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다. 진선규는 작품을 준비하며 박시헌과 직접 만나 접점을 찾아갔다. 복싱 연습도 함께했다. 그의 인생을 들여다보며 느낀 인상을 연기에 녹였다. 박시헌에 대해 이야기하던 진선규는 이내 스스로의 삶을 돌아봤다. 체육교사를 꿈꿨던 그는 친구와 극단에 놀러 갔다가 마음에 불이 붙었다. 2주 동안 독백 세 가지를 달달 외워 한국예술종합학교에 합격했다. 본격적인 배우 인생을 시작한 순간이다. 영화관 도처에 자신의 얼굴이 담긴 포스터가 걸린 건 꿈만 같은 일이었다. 그는 언론간담회에서 눈물을 펑펑 쏟을 정도로 수많은 감회를 느꼈다. 대학로에서 기나긴 무명시절을 함께한 동료 배우 고창석, 오나라와 호흡을 맞춘 건 행복한 기억으로 남았다.
“옛날부터 셋이 막연한 꿈을 꾸곤 했어요. ‘우리 나중에 영화랑 드라마 다 해보자’며 떠들곤 했죠. 그게 현실이 됐어요. 기다렸던 순간인 만큼 즐거움도 컸죠. 같은 꿈을 꾸던 이들과 함께 꿈을 이뤘을 때 나오는 시너지 효과란! 하하. 주인공이 되면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나라 누나와 (고)창석 형에게는 자연스럽게 기댈 수 있었어요. 학생 역할을 맡은 배우들과도 몇 달 동안 복싱 연습을 함께하며 치열하게 합을 맞췄어요. 좋았던 기억뿐이에요.”
연기인생 근간은 성실함이다. 그는 경험이 곧 능력이 된다고 믿는다. “꾸준함이 곧 재능이더라고요.” 확신으로 가득한 눈에서 힘이 넘실댔다. “긴 무명시절도 좋아하던 일이라 마냥 즐거웠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도 발전하는 게 느껴지니 더 재밌더라고요. 10년 정도 되니까 어느 순간 잘한다는 말을 듣기 시작했어요. 그 시간을 함께한 동료들과 가족 덕이죠. 저를 지금까지 달려오게 했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에요.”
진선규는 대학교 은사에게 들은 말을 지금도 종종 되새긴다. “저를 도화지에 비유하셨어요. 얼굴은 평범한데 연기가 잘 드러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는 특별한 연기 기술을 갖고 있지 않다고 했다. 상대방의 감정을 먼저 느끼고, 자신이 느낀 인상을 전달해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 진선규가 생각하는 좋은 연기의 출발점이다. 그는 ‘카운트’에서 단역들과 각각 만나 유기적인 호흡을 만들어갔다. 주인공으로서 단역과 합을 맞추는 건 무명 시절부터 가진 바람이었다.
“주인공이어서 할 수 있던 일이에요. 단역분들 모두 연기를 잘하세요. 하지만 제작 환경 상 시간에 쫓기다 보면 주인공이 단역과 연기를 맞추긴 어렵거든요. 무명 시절, 준비했던 연기를 혼자 하고 집에 가는 길 내내 같은 대사를 내뱉곤 했어요. 적어도 제가 주인공인 작품에선 단역분들이 그러지 않길 바랐어요. 그래서 ‘카운트’ 출연을 결정한 후 제작사에 단역 배우분들과 한분씩 뵙고 싶다는 요청을 드렸죠. 합을 맞추니 그분들이 준비한 대사도 더 잘 드러났어요. 현장 분위기도 당연히 좋았고요. 제 부족함을 그분들이 잘 채워줬어요. ‘카운트’의 따뜻하고 건강한 분위기는 그분들 덕에 가능했어요.”
진선규는 단역으로 온갖 작품을 전전할 때, 오디션 없이 캐스팅되는 배우가 되길 갈망했다. 수도권에 가족과 함께 기거할 집을 갖고 싶었다. 진선규는 “꿈을 90% 이뤘다”면서 “더 큰 꿈을 꾸지 않는다. 욕심내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다른 꿈의 배턴을 아이들에게 넘기려 해요. 아이들이 꿈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누군가는 ‘네가 뭐라고 그런 말을 하냐’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큰 욕심 없이 좋은 작품으로 관객과 만나고 싶어요. 무대, 스크린 어디서든요!”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