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모름’이 남긴 잔상 [친절한 쿡기자]

‘이유 모름’이 남긴 잔상 [친절한 쿡기자]

기사승인 2023-04-19 05:00:02
쿠키뉴스 자료사진

잠을 쉽게 이루기 힘든 밤이었습니다. 면접을 보고 돌아온 날이면 그랬습니다. 상대와 내가 주고받은 말이, 억지로 마주치려 했던 상대의 눈빛이, 옆 사람의 유독 결연한 의지가, 낯선 회의실의 무거운 공기가, 세상 따뜻하게 내리쬔 햇살이 남긴 잔상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밤들은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스스로를 엄하게 혼내는 시간이었습니다. 대체 왜 나한테만 그런 질문을 했는지 분노하는 시간이었고, 역시 난 안 되는 건가 하며 심연으로 깊이 내려앉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도 다시 힘내서 도전하라고 조언하는 사람들은 대체 그런 밤들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붙잡고 물어보고 싶은 날들이었습니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습니다. 내 궁금증에 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요.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에서 차세대 킬러 유망주로 등장하는 김영지(이연)에 유독 눈길이 갔습니다. 오랜 기간 어두운 지하에서 수련을 거듭해온 영지는 자신의 우상인 길복순(전도연)과 첫 작전에 투입됐다가 일이 잘못돼 회사에서 퇴출당하고 맙니다. 그는 복순의 집까지 찾아가 하소연합니다. 자긴 이제 어떻게 하냐고요. 영지가 잠 못 이루고 보냈을 밤을 생각했습니다. 이제부터 뭘 해야 할지 모를 막막함과 모든 게 끝이라는 아쉬움, 잘못이 없다는 억울함이 가득한 밤이었을 겁니다. 아마 당장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이 컸을 겁니다. 영지가 목숨 걸고 떨리는 손으로 복순의 초인종을 누를 수밖에 없던 이유였을 겁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이유를 모르고 선택당하는 건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자신의 선택이 존중받지 못했다는 사실, 알 수 없는 누군가의 결정으로 앞날이 달라진다는 사실이 곧 무거운 현실로 눈앞에 나타나기 때문이죠. 그 한 번의 선택을 받기 위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된 사람들, 거부당해도 또 한 번 선택의 갈림길에 기꺼이 오르는 사람들을 자주 생각합니다. 시험에 통과한 사람보다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이 다수인데도 마음이 쓰이는 건, 그들은 언제나 소수의 자리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모두의 이야기이고, 나만의 이야기입니다.

최근 채용 면접관으로 참여하면서 오랜만에 그들의 얼굴을 봤습니다. 앞으로 계속 마주칠 얼굴은 소수였고, 앞으로 다시 보기 힘든 얼굴이 다수였습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반짝이는 얼굴이었습니다. 10여년 전 남은 면접의 잔상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처럼, 이날의 반짝임도 오래 남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다들 어떤 밤을 보내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다수에게 남은 그날의 잔상이 조금은 옅어지길 바랍니다. 영원히 알 수 없는 탈락 이유를 조금 덜 궁금해하길 바랍니다. 조금 쉬다가 다시 털고 일어나길 바랍니다.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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