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여학생 조기입학’, ‘쪼이고 댄스’, ‘정관 복원 시술비 지원’ 등 저출산 대책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과학적 근거 없이 아무 정책에나 ‘출산 장려 효과’를 붙이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마저 “저출산 현상을 희화화하는 정책 제안”이라며 황당해 하는 반응을 보였다.
3일 보건복지부 등에 따르면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이 지난달 30일 발표한 ‘재정포럼 2024년 5월호’에는 ‘생산가능인구 비중 감소에 대응하기 위한 재정정책 방향에 대한 제언’ 제하의 간행물이 실렸다.
해당 보고서에는 “남성의 발달 정도가 여성의 발달 정도보다 느리다”라며 “학령에 있어 여성들은 1년 조기 입학시키는 것이 향후 적령기 남녀가 서로 매력을 더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이어 “해당 정책은 본(저출산 장책) 분류에 포함될 수 있다”고도 밝혔다.
문제는 보고서에 여학생의 조기 입학이 실질적으로 남녀 교제 성공에 영향을 미치는지 등을 비롯한 구체적 수치, 기대 효과 같은 객관적 자료가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은 2일 복지부 출입기자단을 통해 보도해명자료를 배포하며 “필자의 개인 의견으로, 본원의 공식 의견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괄약근에 힘을 줘 골반 근육을 강화하는 운동인 ‘케겔 운동법’을 저출산 대책의 일환으로 내놓은 서울시 캠페인도 논란이다. 김용호 국민의힘 서울시의원은 지난달 24일 서울 중구 덕수궁 돌담길에서 ‘쪼이고! 쪼이고! 서울시 시민건강 출생장려 국민댄조(댄스+체조) 한마당’을 진행했다. 한 민간단체가 제안한 댄조는 케겔운동과 체조 동작을 조합한 운동법이다.
김 의원은 지난해 11월 서울시 본회의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을 향해 ‘댄조’를 추는 행사 개최를 질의하는 등 댄조가 출산 장려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취지로 적극 홍보에 나서고 있다. 그는 지난달 31일 낸 보도자료를 통해 “시민의 건강 증진, 치매 예방을 목표로 한다”며 “젊은 여성들에게 다이어트, 미용은 물론 출생 장려 등 효과가 있길 기대한다”고 했다.
서울시가 추진하는 ‘정관·난관 복원 시술 지원’ 사업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서울시는 최근 올해 처음으로 잡은 추경예산안 1조5110억원 가운데 저출생 대책으로 정관, 난관 복원 시술 지원금 1억원을 편성했다. 건강보험을 적용해도 정관과 난관 복원에 각각 40만원, 80만원의 비용이 필요한 만큼, 1인당 최대 100만원의 시술비를 지원해 의료비 부담을 덜어주겠다는 계획이다. 이에 피임을 위해 정관수술을 한 것인데, 임신을 원치 않는 이들을 위해 예산을 쓴다는 질타가 쏟아졌다.
합리적 근거 없이 쏟아져 나오는 저출산 정책을 두고 비판 여론이 거세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3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를 통해 “최근 거론되는 저출생에 대한 대책은 여전히 과거에 머무르고 있다는 지적들이 있다”며 “서울시에서 내놓은 정관 복원 수술 정책은 납득하기 어렵다. ‘쪼이고 댄스’ 캠페인은 인간을 능멸하는 말 아닌가. 한국조세재정연구원 연구 결과도 진정한 대책인지 참 기가 막힌다”라고 꼬집었다.
전문가들 역시 “논할 가치도 없는 정책”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연구관은 3일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과학적 근거 없이 저출산 정책을 막 던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라며 “국가적 생존 문제가 달려 있는 저출산 현상을 체조, 정관수술, 여학생 조기입학 같은 정책으로 희화화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질타했다. 이어 “특히 저출산 현상이 심각하니 이름만 갖다 붙이면 예산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쓴소리 했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도 “여학생 조기입학, 체조 캠페인은 (저출산 근본 원인에 대한) 맥락을 못 읽는 정책”이라며 “차라리 저출산 현상에 대해 걱정을 안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정 교수는 “정관 복원 시술은 일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출산 흐름을 바꾸긴 어려워 보인다”면서 “1970년대에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으로 정관수술이 적극 권장됐는데, 이를 출산 장려 정책으로 방향만 바꾼 것이다. 과거 산아제한 정책 성공 신화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고 전체적인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정책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일·가정 양립’이 가능한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입을 모았다. 허 연구관은 “여성들의 임신과 출산이 ‘패널티’로 돌아오는 사회”라며 “육아휴직을 쓰겠다고 하면 회사에서 책상을 치운다고 하는 수모를 겪으면서 굳이 아이를 낳아 키워야 하는 이유를 못 찾는 것”이라고 원인을 짚었다. 그러면서 “일·가정 양립이 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실효성 있는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도 “일·가정이 양립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면서 “부모가 일할 때 아이들이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등 사회적 돌봄 체계 확립을 위한 정부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 또 기업들이 가족 친화 경영을 성장 필수요건으로 느낄 수 있도록 정부가 정책 홍보와 컨설팅에 나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언했다.
김은빈 기자 eunbeen1123@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