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 상위 10% 지자체가 국가예산의 35%를 독점하는 구조적 불평등 속에서 해운대구와 울진군의 1인당 복지예산 8배 차이는 양적 균형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20세기 ‘물리적 분배’ 중심 정책이 수도권 집중과 지방소멸 위기를 초래한 반면, 21세기 ‘가치 순환’은 분권형 거버넌스와 주민 주도적 참여를 통해 기회균등에서 공정성장으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최근 한국의 지역정책은 물리적 균형에서 과정 중심의 공정성으로 전환되는 중대한 변곡점에 직면해 있다. “균형”이 공간적 자원 배분에 머물렀다면 “공정”은 성장 과정의 주체적 참여를 보장한다.
중앙정부 주도의 인프라 투자 중심 정책은 양적 성장은 달성했으나 질적 격차 심화를 초래했다. 예를 들어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이나 공공기관 이전 등 물리적 사업에 집중하면서 지역의 고용·소득 재분배 실패가 두드러졌다. 특히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노동생산성 격차(5배)와 청년층 일자리 질적 차이는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공공기관 이전 등 정책이 일시적 효과에 그치며 지역경제의 자기성장 역량을 약화시켰다. 2018년 재정분권 1단계 이후 지역자율계정 이양으로 기존 사업이 축소되면서 지역 주도 정책 추진의 어려움이 가시화되었다.
수도권-비수도권 공간적 이분법적 접근은 지역 간 다양성을 무시한 획일적 정책을 초래했다. 인구·산업 집중의 근본원인인 집적경제 효과를 외면한 채 인위적 분산정책을 추진하며 오히려 자원배분 왜곡과 국가경쟁력 저하를 야기했다. 기존 균형발전 정책은 집적경제의 합리성을 무시한 채 형평성 원칙을 강조하며 비효율성을 고착화시켰다. 청년층이 수도권으로 이동하는 근본적 요인인 임금 격차(특히 대졸 이상)와 고용안정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점이 핵심 한계로 지적된다.
인구구조 변화로 재정지원의 한계가 노출되며 자생적 성장모델 구축이 시급하다. 글로벌 트렌드인 EU 공정전환 사례처럼 탈탄소화와 고용안정을 동시에 추구해야 하며, CBAM(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 탄소국경세) 대응 차원에서 지역기업의 탄소중립 역량 강화가 필수적이다. 사회통합 측면에서는 소득·문화 격차가 갈등 심화로 이어지며, 기존 중앙정부 주도의 균형발전이 지역 간 질적 격차를 해결하지 못한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지역 주도형 성장을 통해 산업구조 전환과 주민 참여를 결합한 공정성장 모델이 필요하며, 수도권 집중으로 인한 국가경쟁력 약화를 방지하기 위해 분권형 협력체계 구축이 절실하다.
지역공정성장, 참여·분배·기회의 삼각편대를 세워야 한다.
참여공정성 강화를 위해 지방자치단체 예산편성권 30% 이상 이양과 디지털 주민투표 플랫폼 도입으로 주민 주도 거버넌스를 구축하고, 지역공정성장지수(RFGI)를 개발해 참여·분배·기회 균등을 종합 평가해야 한다. 분배공정성 혁신 차원에서는 지방소비세율 조정권 위임과 재생에너지·관광수익의 5% 지역기금 환원을 의무화하며, 비정규직·플랫폼노동자를 포괄하는 한국형 실업부조와 그린수소·해양바이오 등 지역특화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 기회공정성 확대를 위해 지역주력산업 연계 지방대학 특화학과를 육성하고, 중소기업 R&D 세액공제율을 40%→50%로 상향하며, 원격근무 허용직종 확대와 광역시군별 AI 직업훈련센터 설치로 디지털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 이를 통해 중앙주도 양적 성장에서 지역 주도 질적 성장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추진한다.
2024년 이시바 총리 주도의 일본 지방창생(地方創生) 2.0 전략은 인구감소 위기(896개 소멸위험지역 지정)와 도쿄 일극집중(전 인구 30% 집중)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존 정책을 혁신적으로 업그레이드했다. 핵심은 디지털 기술 접목과 주민 주도성 강화다. 웹3.0 기술을 활용해 지역 관광자원을 NFT·메타버스로 디지털화하고, 초고속 인터넷 전국망을 구축해 원격근무 기반을 확충하는 등 스마트 인프라를 전면 도입했다. 또한 청년 창업자금 무이자 대출(최대 1,000만 엔)과 지방대학 등록금 감면(연 50만 엔 한도)으로 인재 유입을 촉진하고, 관계인구(정기적 교류·기여 비거주자) 확대를 통해 지역 경제의 외연을 넓혔다. 조직 개편 측면에서는 총리 직속 ‘지방경제·생활환경 창생본부’를 신설해 예산과 정책을 통합 관리하며, 교부금을 2배 증액(연 1조 엔)해 재정 지원을 강화했다. 공간 재편 전략으로는 인구 30만 규모 경제권 형성과 도시 은퇴층의 지방 이주를 유도하는 CCRC(지속적 돌봄 커뮤니티) 도입을 추진 중이다. 이 전략의 궁극적 목표는 도쿄 집중 완화와 지역주도 성장체계 구축을 통해 일본 경제의 새로운 동력을 창출하는 데 있다.
“주민이 주도하는 예산편성에서 시작하라”. 지방의회에 예산편성권을 확대하고 디지털 주민투표 플랫폼을 도입해 사업 결정 과정을 민주화해야 한다. 중앙정부·지자체·민간의 3각 협업체계를 구축해 정책 추진 주체를 ‘연계자’에서 ‘실행주체’로 전환할 때 지역혁신은 본격화된다.
“재정개혁 없이는 공정성장도 없다”. 균형발전특별회계 예산의 30% 이상을 지역선택형 사업에 전용하고, GRDP 격차·청년고용률을 반영한 성과연동형 교부금을 도입해야 한다. 재생에너지·관광수익의 5% 지역기금 환원을 의무화하며, 지방소비세율 조정권 이양으로 지역특화 세제를 차등 적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산업전략은 수요에서 답을 찾아라”. AI 공정최적화 지원과 지자체-대학-기업 공동연구센터 확대로 스마트 산업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그린수소·해양바이오 등 미래산업에 특화된 창업펀드를 조성하고, 원격근무 허용직종을 200% 확대해 공간적 한계를 넘어설 때 청년 일자리 문제는 해결된다.
“측정할 수 없는 정책은 죽은 정책이다”. 참여(30%)·분배(40%)·기회(30%)의 공정성을 복합 측정하는 RFGI 지수를 개발해 정책 효과를 입체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디지털 트윈 기술로 실시간 경제지표를 추적하며, 사업 종료 후 5년간 지속가능성 평가를 의무화하는 것이 생존전략이다.
“법제도 개혁이 경쟁력을 결정한다”. 『지역공정성장특별법』을 제정해 참여·분배·기회 기준을 법제화해야 한다. 중앙부처 30% 이상 지방 이전을 통해 행정수도 기능을 분산시키고, 지방의회 정책개발비를 대폭 확대해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
“인재는 지역의 미래다”. 지역주력산업과 연계한 특성학과를 육성하고, 지역필수인력 전공자 등록금 50% 감면으로 인재 유입을 촉진해야 한다. 로컬기업-지자체-대학이 공동 운영하는 인턴십 프로그램을 의무화해 청년 인재풀을 구축할 때 지속가능한 성장이 가능하다.
지역공정성장은 단순한 정책이 아닌 문명전환의 프로젝트다. 주민 주도 거버넌스, 성과중심 재정개혁, 미래산업 육성의 삼각축이 제 역할을 할 때 비수도권은 대한민국 경제의 새로운 성장엔진으로 재탄생할 것이다. 지역의 역량을 신뢰하고 권한을 이양하는 것이 공정성장의 출발점이다.
글. 전북대학교 교수 조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