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기 치매, 경도인지장애 환자에게 폭넓게 처방되던 ‘콜린알포세레이트 제제’(콜린 제제) 건강보험 급여 축소 취소 소송에서 제약사들이 모두 패소하며 거의 5년간 이어진 법적 공방이 사실상 종지부를 찍게 됐다. 콜린 제제가 급여 취소 수순을 밟게 되면서 인지 개선제 시장의 지각변동이 예상된다.
10일 제약바이오업계에 따르면 지난 3월 ‘콜린 제제의 건강보험 약제 선별급여 적용 고시를 취소해달라’는 제약사들의 상고를 대법원이 기각했다. 제약사들은 종근당그룹과 대웅바이오그룹으로 나눠 콜린 제제 급여 축소의 부당함을 따지는 소송을 2020년부터 벌여왔다.
콜린 제제 소송은 2020년 보건복지부가 치매 진단을 받지 않은 환자에 대해 콜린 처방 시 본인부담률을 기존 30%에서 80%로 상향한다고 고시하면서 시작됐다. 콜린 제제는 기억력이나 집중력 저하가 있는 환자들의 인지 기능 개선을 목적으로 사용돼 온 약물이다. 경도인지장애, 초기 치매, 뇌혈관 질환 이후 인지 저하가 우려되는 환자군에 널리 처방돼 왔다. 처방 금액은 지난 2019년 3525억원에서 2022년 4947억원으로 3년 새 40.3% 증가했다.
대법원이 정부 측 손을 들어주며 콜린 제제 급여 축소를 둘러싼 법적 공방은 사실상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번 판결은 다른 제약사들의 유사 소송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마지막 소송이 종료되는 올 하반기 이후엔 콜린 제제의 본인부담률 축소가 현실화될 것으로 점쳐진다. 본인부담률이 80%로 인상되면 환자 부담액은 연간 16만7000원에서 44만6000원으로 2.7배 높아진다.
제약사들은 콜린 제제 소송에서 연이어 고배를 마셔왔다. 지난달 29일 서울고등법원은 콜린 제제 요양급여비용 환수협상 명령 취소 소송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종근당 외 18개 업체가 제기한 항소를 기각했다. 정부는 현재 재평가가 진행 중인 치매와 경도인지장애 적응증에서 콜린 제제의 유효성을 입증하지 못할 경우 그간 지급됐던 요양급여비를 환수한다는 입장이다.
유효성 입증에 실패하면 콜린 제제에 대한 적응증 삭제는 물론 건보 급여 중단과 함께 시장에서 퇴출될 가능성도 있다. 업계에선 2022~2023년 ‘아세틸엘카르니틴’, ‘옥시라세탐’ 등 다른 인지 개선제들이 임상 재평가에서 탈락하며 시장에서 퇴출된 만큼 콜린도 같은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오는 2027년까지 콜린 제제의 적응증별로 순차적인 임상 재평가를 진행할 계획이다. 제약사들은 임상 재평가 결과에 따라 최대 20%의 처방액을 환수할 수 있다.
콜린 제제가 약품비 지출 급증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자 국민건강보험공단도 관리 방안 마련을 고심하고 있다. 건보공단의 ‘콜린알포세레이트 성분 의약품 처방 현황’에 따르면, 콜린 제제는 지난 2021년 5260억원, 2022년 5713억원, 2023년 6366억원 등 매년 청구액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콜린 제제 처방 규모가 6000억원에 달하는 만큼 제약사들이 임상 실패 시 청구되는 환수금액은 수천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A제약사 관계자는 “콜린 제제의 효과 입증을 위한 임상 재평가가 실패로 결론 날 경우 막대한 손실이 불가피하다”면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시나리오다”라고 귀띔했다.
콜린 제제 대체품 ‘은행엽 제제’ 주목
콜린 제제 급여 축소 가능성이 높아지며 뇌기능 개선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진 ‘은행엽건조엑스 제제’(은행엽 제제)가 대체제로 부상하고 있다. 올해 들어 허가된 은행엽 제제로는 △일동제약 ‘써큐록신정 240㎎’ △환인제약 ‘환인징코정 240㎎’ △신일제약 ‘징코플로우정 240㎎’ △한미약품 ‘한미징코정 80㎎’ △유한양행 ‘써클그린정 240㎎’ △건일바이오팜 ‘진코빌정 240㎎’ 등이 있다. 지난 한 해에만 85개 제약사의 88개 품목이 허가된 점을 고려하면 시장 확대 속도가 빠르다.
은행엽건조엑스는 은행나무잎에서 추출한 성분을 건조해 만든 것으로, 은행엽건조엑스 200㎎ 이상 고용량을 매일 장기간 복용했을 때 경도인지장애 환자의 인지기능 개선 효과가 나타났다는 국내외 임상연구가 다수 발표된 바 있다. 이외에도 말초동맥 순환장애(간헐성 파행증), 어지러움, 이명, 기억력 감퇴 등 치매성 증상을 수반하는 뇌기능 저하에 효과가 있다. 일반의약품으로 출시된 은행엽 제제는 의사 처방 없이도 약국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국내 은행엽 제제 시장은 연간 600억원 규모로 추산된다. 의약품 시장조사기관인 아이큐비아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은행엽건조엑스 성분 일반의약품 시장 규모는 171억원이다. 지난해 1분기 163억원과 비교해 5% 증가했다. 다수 제약사는 이미 콜린 제제 대신 은행엽 제제로 눈을 돌렸다. 콜린 제제 품목을 보유한 제약사 중 지난해와 올해 은행엽 제제 품목을 허가받은 곳은 56곳에 달한다.
제약사들은 은행엽 제제에 대한 소비자 관심이 확대되면서 마케팅 역량을 집중하는 모습이다. 지난해 12월 ‘메모레인캡슐’을 선보인 동국제약은 TV 광고 모델로 유명 배우를 앞세워 홍보에 나섰다. 메모레인캡슐은 은행엽건조엑스와 인삼40%에탄올건조엑스 복합 성분의 일반의약품이다.
종근당도 작년 2월 메모레인캡슐과 같은 성분의 기억력 감퇴 개선 일반의약품 ‘브레이닝캡슐’을 내놓고, 최근 홍보 모델로 인기 배우를 발탁해 브랜드 캠페인에 나섰다. 브레이닝캡슐 임상에 따르면, 건강한 중년층을 대상으로 12주간 해당 약물을 투여한 결과 평균 7.5%의 기억력 개선 효과를 보였으며, 2주간의 휴약기 동안에도 효과가 유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업계 관계자는 “은행엽 제제 품목은 제약사들이 위탁생산을 통해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시장 진입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며 “당장 은행엽 제제가 콜린 제제를 완전히 대체하기는 어렵겠지만, 초고령화 진입 및 치매 인구 증가에 따라 관련 의약품 수요는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