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자 그대로 생사를 놓고 다투는 게임에서 ‘만삭’이라는 핸디캡을 가지고도 민폐라는 느낌이 없다. 때때로 흔들리기도 하지만 타고난 중심이 단단하고, 작은 체구에서는 강단이 뚝뚝 묻어난다. 형형한 눈빛이 그렇게 말해준다. 8일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난 가수 겸 배우 조유리의 인상도 그러했다.
조유리는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시즌2에 이어 시즌3에서 준희 역을 맡았다. 준희는 명기(임시완)의 전 여자친구이자 그의 아이를 밴 임신부다. 불편한 몸으로 아기를 지키고자 전력투구하다가, 술래잡기 게임 중 금자(강애심)와 현주(박성훈)의 도움을 받아 출산에 성공한다.
아이돌 출신에다 고작 24살인 조유리가 소화하기에는 부담이 있는 역할이었다. 그러나 이는 제삼자의 기우였을 뿐, 본인은 그리 느끼지 않았다. 그저 어색해 보이지 않기 위해 여기저기 자문을 구하며 차근차근 캐릭터를 준비했다는 전언이다.
“애심 선배님이나 어머니께 여쭤봤어요. 그리고 출산하신 지인이 있어서 많이 여쭤봤어요. 특히 출산은 아무 생각 없이 해야 한다더라고요. 머리가 하얀 상태라서 꾸며내려고 하면 어색하다고요. 그렇게 어렵진 않았던 것 같아요. 어머니가 이 장면을 보고 ‘유리야, 잘했다. 고생했다’고 해주셨어요.”
결론적으로 준희가 어렵게 낳은 아이는 게임 우승자가 됐다. 앞서 황동혁 감독은 이 아이를 ‘미래세대의 심벌’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시청자 의견은 엇갈렸다. 이 상징에 공감하는 이도 있었지만, 메시지를 위한 수단으로 준희를 소비했다는 비판 역시 존재했다. 조유리는 조곤조곤한 어조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준희를 연기하는 입장에서 준희를 장치나 도구로 보지 않았어요. 강인하지만 안타깝고, 그냥 안아주고 싶은 한 아이로 생각했어요. 아기 역시 준희를 게임에 넣기 위한 장치나 도구로 생각하지 않았고요. 준희는 다양한 인물들 사이에서 그나마 인간성을 잃지 않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캐릭터라고 생각했어요.”
조유리는 게임장 밖에서 연락이 끊겼던 명기를 믿지 못하면서도, 내심 믿고 싶어 하는 준희를 어색함 없이 그려냈다. 배역에 완전히 몰입한 덕분이었다. 그만큼 극 후반부 명기에 대한 실망감도 상당해 보였다.
“밀어내려고 하지만 마음은 계속 잡아주길 바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연기했었어요. 하지만 현주라는 소중한 사람을, 생존이 아닌 상금을 위해서 죽였을 때부터 인간으로 안 보였던 것 같아요. 그때 믿음이 다 무너졌고요. 마지막 게임에서는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나중에는 ‘연기 최고’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을 추스르고 어떻게 연기했냐고 (임시완에게) 연락했어요.”

한때 연인이었지만 일말의 정조차 사라진 모양이었다. 조유리는 여전히 준희였다. “그런 아쉬움은 있죠. 게임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잘살아 볼 수 있지도 않을까. 아니에요. 딱히 할 말은 없어요. 고맙다는 얘기도 미안하다는 얘기도 하고 싶지 않아요. 뭐라 하고 싶지 않아요.”
준희와 겹쳐 보이는 면모는 또 있었다. 바로 따뜻함에 대한 믿음이었다. “희망과 상식이 없는 세상 같아도 결국 따뜻함이 이긴다고 (결말이) 말해주는 것 같았어요. 저는 항상 따뜻함이 이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어서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었어요. 앞으로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고 싶어요.”
조유리는 사실상 첫 정극인 ‘오징어 게임’ 시즌2, 시즌3으로 역대급 글로벌 흥행작에 탑승한 배우가 됐다. 하지만 작품이 2주째 93개국 1위를 차지하면서 신기록을 쓴 것도 기쁘지만, 그에게는 더 자랑스러운 순간이 따로 있었다.
“너무 큰 도전이었어요. 이제 또 다른 도전을 하게 된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선배님들 연기를 눈앞에서 보고 합을 맞춰본 것만으로도 다음 스텝으로 갈 수 있게 됐어요. 특히 이병헌 선배님과 이정재 선배님이 눈빛이 좋다는 칭찬을 많이 해주셨어요. 누가 강점이 뭐냐고 물어보면 눈빛이라고 대답하려고 했었어요(웃음). 마음속에 오래 남을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