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서도 강병규는 양준혁에 대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선수협을 함께 만든 야구 선배로서 선수협이 잘 운영될 수 있도록 자기 목소리만 내준다면 다행이고 오히려 고마울 것이라고 했다.
-양준혁이 선수협에 어느 정도 관여했다고 생각하나.
“선수협 조직 정도가 아니라 처음부터 양준혁의 머리에서 나왔고 끝난 거다. 나중에 정부와 협의해서 실체를 인정받고 후일을 도모한 것도 난 끝까지 반대했다. 양준혁은 야구를 안 할 각오로 선수협을 만든다고 말했다. 아니, 선수협이 만들어져도 야구를 안 한다고 했다. 그 정도로 각오가 대단했다. 그 말을 난 믿었다.”
-현재 양준혁은 송진우와 더불어 선수협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요즘 내가 트위터에서 매일 양준혁을 비판하는데 왜 아무 말도 못하는지 아나. 정말 감동스러운 두 장면이 있다. 아까 말했지만 선수협 창립총회 하는 날 정말 너무 혼란스러웠다. 63빌딩에 모인 상황에서도 그냥 하지 말자, 다음에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양준혁의 표정이 기억난다. 정말 죽을 맛 그 자체였다. 원래 쿠데타는 성공하면 대통령이 되지만 실패하면 죽는다. 창립총회가 실패하면 양준혁은 유니폼을 벗는 거였다. 벗을 각오는 했지만 진짜 벗는 거였다. 그는 8개 구단 대표가 모인 자리에서 딱 일어나더니 ‘난 죽어도 한다. 혼자라도 끝까지 간다’고 말했다. 눈물을 흘리면서. 그래서 내가 그랬다. ‘이 정도인데 우리 같이 따라가자. 저런 각오로 하는데 같이 가 보자’고….
또 추운 겨울에 매일 전국을 돌며 선수협 지지해 달라고 외치면서 고생할 때 하루는 내게 ‘병규야, 난 너만 믿는다. 아무도 안 믿는다. 너랑 나랑 둘만 있으면 이길 수 있다. 너만 변하지마’라고 했다. 갑자기 벅차서 내가 ‘알았어. 형이나 변하지마’라고 했다. 사실 다른 대표들은 그리 열정적이지 않았다. 양준혁과 내가 결사대 2명이었다. 하지만 내게 그렇게 말했던 사람이 지금은 선수협을 버렸다. 내 얼굴을 어떻게 보겠나.”
-두 사람의 우정이 가장 빛났던 순간이겠다.
“결사대라고 하지 않았나. 지금은 상상도 못하지만 롯데호텔 지하식당에서 구단주들이 조찬모임을 하는데 그 문을 박차고 들어갔던 사람이 나다. 하도 선수협을 안 만나주니까. ‘그래도 선수니까 밥은 사주겠지’라는 생각에 무작정 찾아가 문에 발길질을 해댔다. KBO 직원들하고 몸싸움도 했다. ‘진짜 미친 놈’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지금 어린 선수들이 들으면 전부 거짓말이라고 하겠지만….”
-양준혁은 선수협을 버리지 않았고 2001년에 집행부가 넘어간 이유도 ‘후일 도모’라고 말한다.
“진짜 내가 화나는 게 그거다. 선수협 1기가 퇴진하고 2기로 넘어갔는데 2기 회장이 누구였는지 아나? L 선배다, 해태 L 선배. L 선배는 선수협 창립 자체를 반대하던 사람이었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뭐가 후일 도모인가. 난 정말 양준혁에게 듣고 싶다. 왜 선수협을 L 선배에게 넘겼고 이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는지…. 말은 이렇게 한다. 선수협의 실체를 인정 받았다고. 그건 말장난이다. 그러면 선수협을 만들 때 실체만 인정 받는 수준까지 의견을 모았어야지. 구단하고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던 사람이 선수협 자체를 반대하던 사람에게 선수협을 넘겼다. 프로야구의 공멸을 막기 위해? 표현은 좋다. 그래서 넘긴 사람이 L 선배인가. 책임회피, 직무유기. 이런 것도 아니다. 그냥 본인이 해온 일들을 후회했다고 한 것이나 다름 없다.”
-만약 당신이 계속 1기 집행부에 남아 있었다면 뭐가 달라졌을까.
“적어도 해태 L 선배 체제는 막았을 거다.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안 넘겼다. KBO나 구단이 정말 교활한 것이 뭔지 아나? 막 약을 올린다. 정권도 바뀌는데 돌아가면서 회장을 하라고 한다. 얘네들도 선수인데 왜 너희들만 집행부를 하나, 돌아가면서 해야지, 이런다. 기가 찰 노릇이다. 가뜩이나 집행부를 안 하려는 분위기인데. 사실 막말로 L 선배가 회장이라도 상관없다. 선수협 일만 잘하면 된다. 그런데 그게 되겠나. 열정 있는 사람들이, 목숨 건 사람들이 모였어도 잘 안 되는데 열정도 없는 사람들이 하니 잘 운영되겠나. 그 때부터 선수협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이종범은 어떤 인물이었나.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나. 친(親)선수협이었나.
“철저히 중립을 지켰다. 스타였는데도.”
-양준혁이 왜 선수협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나.
“아까 말한 선수협 설립목적 등도 있겠지만, 내가 추측해보건대 이렇다. 삼성에서 트레이드된 직후 해태 김응룡 감독이 1년만 뛰고 보내준다고 했는데 진짜 보내줄지 불안해서 그랬거나, 야구를 안하면 안하지 해태에서는 하기 싫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해태로 트레이드된 직후 본인이 직접 은퇴를 말하지 않았나.”
-해태가 선수협 참여를 이유로 양준혁을 내쳤다면 자칫 무적 선수가 될 수도 있었는데.
“양준혁은 선수협이 성공하든 아니든, 그러니까 창립이 되든 안 되든 유니폼을 벗겠다고 했다. 실제 야구 안할 생각을 했을 수 있다. 그런데 나중에 그 마음이 변한 거다. 선수협에 참여한 선수들이 트레이드도 되고 했지만 전부 야구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랬으면 솔직하게 말해야 했다. 자기가 선동해서 옷을 벗은 선수들이 수두룩한데 그들의 뒤를 돌아봤어야 했다. 영웅처럼 책을 내지는 말았어야 했다. 구단 타도하겠다고 말하던 사람이 ‘나는 전직 삼성맨이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안된다.”
-양준혁이 선수협을 버렸다, 뒤로 물러났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뭔가.
“간단하다. 해태에서 벗어난 다음부터는 선수협 이야기 자체를 거의 안 했다. 선수협 결성 당시를 빼면 열정적이지도 않았고. 나도 듣는 소리가 있다. 양준혁이 선수협 모임에 잘 나가지도 않고 나와도 말을 잘 안 한다고 들었다. 후배들 입장에서는 ‘저 선배도 가만히 있는데 우리가 왜 나서느냐’고 하지 않겠나. 선수협 창시자라면 KBO와 구단의 어느 부분을 공략하고, 우리는 이렇게 와해됐으니 너희들은 그러지 말라고도 해야 한다. 왜 그런 역할을 못해줘, 그 역할을….”
진짜 기가 막힌 게 2009년의 기억이다. 현 선수협 집행부가 선수협을 선수 노조로 전환하려고 했다. 실체는 인정 받았는데 대화 자체를 안해주니까 말이다. (KBO나 구단 측은) 만나더라도 다음에 연락을 안했다. 그래서 파업도 할 수 있고 쟁의도 할 수 있는 노조를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양준혁은 어땠나. 삼성은 노조에 반대하고 퇴장해버렸다. 선수협 만든 사람이 노조 만든다니까 반대했다. 이게 말이 되나.”
-방송인으로 잘 나갈 때 이야기 안 하고 왜 이제 와서 뒤늦게 양준혁을 비판하는지 의문을 갖는 시각도 많다.
“그게 잘 모르는 분들 논리인데, 내가 왜 양준혁을 비판하나. 선수 시절 양준혁을 비판하나? 야구 잘한 선수를 비판할 부분이 뭐가 있나? 오직 선수협 부분이다. 양준혁을 비판하는 이유는 자신이 선수협을 만들어 놓고도 2001년부터 뒤로 빠져 선수협 자체에 아무 관심을 안 갖는다는데 있다. 선수협이 잘한 일이 있으면 칭찬도 하고, 잘못했으면 혼도 내고 그래야 하는데 아무 관심이 없다. 양준혁 비판은 선수협 비판으로 확장된다.
선수협에 해태 L 선배 체제가 들어서고 나도 선수협을 외면했다. 신경 끄고 살려고 했다. 그러다 선수들이 직접 뽑은 이종범 체제가 들어서자 이종범과 N 전 사무총장에게 계속 강한 선수협을 만들라고 주문했다. 집행부의 무능함을 개선하라고 여러 차례 충고했다. 2007년 K 사무총장 임명 시에도 역할을 했다. 하일성 KBO 사무총장과의 만남도 주선하고 KBO가 선수협과 적극적으로 대화에 임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다 최근 선수협 뇌물 횡령사건을 알게 됐다. 지금 선수협을 비판하지 않으면 우리 선수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방송인으로 활동할 때는 누워서 침 뱉는 식이라 선수협을 강하게 비판하지 못했는데 그게 지금 암덩어리를 키운 것 같다. 책임을 통감한다.”
-양준혁에게 어떤 모습을 원하나.
“뒤로 빠져 있지 말고 본인이 만든 선수협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관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내길 바란다. 선수협이 뇌물과 횡령으로 형사사건에 연루된 상황이다. 창시자 입장에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지 않나. 자기 재단 만들고 야구 해설할 때가 아니다. 꾸준히 선수협에 충고하고 그랬으면, 잡초만 솎아내면 될 일을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일을 키웠다. 지금 선수협 꼴이 이 모양인데 무슨 선수협 영웅인가.
양준혁이 내게 할 말 있고 불만이 있으면 직접 따져주길 바란다. 양준혁은 성격이 조용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꽤 수다스럽다. 그런데 선수협 관련 이야기에는 일절 입을 닫고 있다. 내 말이 틀렸으면 틀렸다고 하면 되는데 그냥 가만히 있다. 트위터에 몇 줄 쓴 것이 전부다. 자신이 만들자고 주장한 선수협 때문에 수많은 선수들이 유니폼을 벗었고 지금도 힘들게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점을 알면 좋겠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조현우 기자 can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