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정아는 김윤석을 잘 몰랐다. 대중들이 김윤석을 ‘황해’ 혹은 ‘추격자’등의 강렬한 이미지로 기억하는 것처럼, 그녀 또한 그랬다. 그래서 그녀는 김윤석의 시나리오 ‘미성년’을 받아보고 나서 당황했다. 자신이 아는 김윤석과 달라서였다. 최근 영화 ‘미성년’(감독 김윤석)개봉을 앞두고 서울 팔판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염정아는 “막상 만났더니 ‘그러실 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배우 김윤석의 거친 모습과는 다른, 다정다감하고 섬세한 감독 김윤석이 거기 있었단다.
“저한테 ‘미성년’ 시나리오를 처음 주셨다는 것 자체가 영광스럽게 느껴졌어요. 어렴풋이 ‘아. 연출을 하면 잘 하실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거든요. 같은 영화를 했지만 촬영을 같이 맞춰본 적은 없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그분의 첫 연출작 시나리오를 제게 주신 거예요. 자기 이름 걸고 하는 첫 작품인데 배우 고르는 데도 얼마나 고심을 했겠어요? 친한 배우 분들도 많을 거고 말이에요. 그런데 제게 그 시나리오를 주셨다는 게 정말 기뻤어요.”
‘미성년’에서 염정아가 맡은 영주는 찰랑찰랑 넘치기 직전의 유리잔 같은 캐릭터다. 남편의 불륜을 알아챈 뒤에도 딸의 일상이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불륜 상대의 딸에게도 원망을 퍼붓기는 커녕 ‘너도 피해자다’라고 생각하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쓴다. 감정을 꾹꾹 눌러담아야 하기에 더 어려운 캐릭터였고, 고충도 심했다.
“촬영 직전까지도 사실 막연했어요. 결국 감독님만 믿는 모습이 됐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게 정답이었어요. 촬영 회차가 다른 영화에 비해서 많지 않은 편이다 보니 매번 감독님께서 여기선 이렇게, 저기선 저렇게 해라 하는 식으로 디렉팅을 섬세하게 해주셨죠. 가장 반가운 건 배우 입장에서 디렉팅해주신다는 점이었어요. 배우가 어떻게 어떤 감정으로 연기하는지를 다 관찰한 후에, 배우 입장에서 가장 이해가 편하게 설명해주시더라고요.”
염정아는 그 과정에서 김윤석의 ‘내공’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예를 들면 대원(김윤석)이 딸 주리(김혜준)를 내버려두고 도망친 후, 딸이 울며 엄마에게 “아빠가 도망갔다”고 일러바치는 과정에서 영주는 피식 웃는다. 화도 나지만 한편으로는 기가 막히고 웃겨서다. 그 감정이 사실은 김윤석의 디렉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염정아는 털어놨다.
“표정관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제가 아무리 영주의 입장이 되어봐도 화가 억눌리질 않았어요. 표정도 과해지고 계속 숨만 골랐어요. 너무 화가 나니까. 그런데 감독님이 오셔서 그러시더라고요. ‘혹시 피식 웃어보면 어떠냐’고요. 세상에. 저는 왜 그 생각을 못했는지 소름이 쭉 끼치면서 무릎을 탁 치게 되더라고요.”
염정아는 최근의 여성주의적 작품들의 최전선에 서 있다. 우연히라고는 말하기 힘들 것이다. 염정아는 언제나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을 충실히 해왔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은 그녀의 성실함에 비하면 적게 느껴질 정도다. 여성 주연 작품들과 여성주의적 작품들의 최전선에 서 있는 염정아는 요즘 어떨까.
“예전에 받던 시나리오와 요즘 받는 시나리오가 많이 달라요. 캐릭터가 정말 다양해졌고요, 다른 여배우들에게도 선택할 수 있는 작품들이 많이 늘어난 것 같아요. 정말 반갑죠. 매번 여배우들끼리 ‘우리 진짜 할 거 없지 않냐’며 입이 댓발 튀어나와서 불만만 털어놓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말이에요. 여성주연 작품들이 늘어나는 과도기의 작품들을 제가 많이 하게 된 것 같은데, 제가 가장 재밌는 부분은 최근 1~2년 사이 분량이 많진 않더라도 제가 맡게 된 캐릭터들의 진폭이 바뀌어간다는 거예요. 사실 다들 제 대표 이미지로 세고 독한 캐릭터들만 기억하셔서 그렇지, 저도 나름대로 다양한 캐릭터를 해왔거든요. 저에 대한 선입견도 깨진 것 같아서 다행스럽고 좋아요. 앞으로도 더 다양한 작품이 나오겠죠? 즐거워요.”
‘미성년’은 오는 11일 개봉한다.
이은지 기자 onbge@kukinews.com